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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팅

제안서는 두 번째 장에서 결정납니다 [기획의 기술 ②]

목차는 순서가 아니라 지도입니다

‘먹히는 제안서’는 뾰족한 기획에서 시작합니다. 방대한 기업 자료에서 핵심 메시지를 찾아 제안서로 만드는 과정은 매 순간이 판단의 연속인데요. 19년간 카피라이터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한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 디렉터 마녹이 현장에서 쌓은 기획의 기술을 소개합니다.

지난 글에서 저는 제안서를 만들 때 PPT를 가장 늦게 켠다고 썼습니다. 먼저 워드에 전체 이야기를 쓰고 스토리보드로 장표의 구조를 잡은 뒤에야 PPT를 시작한다고요. 그 과정에서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쓰는 페이지가 있습니다. 표지 바로 다음에 나오는 목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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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nok183 | 2026.10.06 | 4분

‘딸깍’의 시대, 제안서에 한 단계가 더 필요한 이유 [기획의 기술 ①]

‘이미 채워진 장표’가 주는 문제

목차라고 하면 보통 이런 식입니다. <1. 시장 분석 2. 경쟁사 분석 3. 타깃 분석 4. 전략 방향 5. 콘텐츠 제안 6. 운영 계획>. 틀린 목차는 아닙니다. RFP에서 요구한 내용도 빠짐없이 들어 있고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있죠. 그런데 한 가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제안서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입니다.

저는 목차를 페이지 목록이 아니라 제안서의 논리 구조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어떤 순서로 꺼내 상대를 설득할 것인지 미리 보여주는 페이지에 가깝죠. 그래서 목차를 보면 그 제안서가 어느 정도까지 기획됐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RFP는 ‘체크리스트’일 뿐, 목차의 ‘순서’가 아닙니다

목차는 상대를 설득하기 위한 논리적 흐름과 이야기의 지도다(자료=클로드 활용)

제안서를 시작하면 가장 먼저 RFP를 여러 번 읽습니다. 클라이언트가 요구하는 사항을 빠뜨리지 않기 위해서죠. 시장 분석, 경쟁사 분석, 타깃 분석, 전략, 콘텐츠, 미디어, 운영안, KPI…. 하지만 저는 이 순서를 그대로 목차로 옮기지는 않습니다. RFP의 항목은 무엇을 빠뜨리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체크리스트이지, 반드시 그 순서대로 이야기하라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AI에게 RFP를 넣으면 목차도 금세 나옵니다. 그러나 대부분 항목을 순서대로 정리하는 데 그칩니다. 빠진 것은 없지만 설득의 순서는 없는 목차죠.

예를 들어 이런 목차가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1. 시장 분석
  2. 경쟁사 분석
  3. 타깃 분석
  4. 전략 방향
  5. 콘텐츠 제안
  6. 운영 계획

이번에는 같은 내용을 조금 다르게 생각해봅니다.

  1. 지금 시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
  2. 그 변화 속에서 경쟁사가 아직 채우지 못한 틈
  3. 그 틈에서 새롭게 움직이는 고객
  4. 브랜드가 지금 해결해야 할 과제
  5.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전략
  6. 전략을 실제 경험으로 만드는 실행안

들어가는 재료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목차에서는 논리적인 흐름이 잘 드러납니다. 앞의 내용 때문에 다음 내용이 필요해지는 것이죠. 시장의 변화를 보고 나니 경쟁 상황을 살펴봐야 하고 그 안에서 고객을 발견하고, 그래서 브랜드의 과제가 무엇인지 정의하게 되는 식입니다. RFP가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면 목차는 그것을 어떤 순서로 이해시킬지를 결정합니다.

챕터 제목보다 질문을 먼저 씁니다

목차를 구성할 때 저는 시장 분석, 타깃 분석, 전략 같은 챕터 이름부터 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대신 이 챕터에서 답해야 할 질문을 먼저 생각합니다. 시장 분석이라면 왜 지금 이 제안이 필요한가? 타깃 분석이라면 누구의 어떤 변화에 주목해야 하는가? 전략이라면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바꿔야 하는가? 실행안이라면 그 전략을 고객이 실제로 어떻게 경험하게 할 것인가? 질문을 먼저 정하면 자료를 보는 기준도 달라집니다. 조사해놓은 데이터가 아무리 많아도 지금 답해야 할 질문과 관계가 없다면 넣을 이유가 없습니다. 반대로 근거가 부족하다면 어떤 자료를 더 찾아야 하는지도 보이기 시작하죠.

이 방법은 팀이 함께 제안서를 만들 때도 유용합니다. “경쟁사 분석해주세요”보다 “경쟁사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부분이 무엇인지 찾아주세요”라고 요청했을 때 결과물이 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자료를 모으는 것과 주장을 만들기 위한 자료를 찾는 것은 다른 일이니까요.

목차를 짤 때 장수도 함께 정합니다

목차를 통해 핵심 내용에 분량이 충분히 분배됐는지 파악한다(자료=클로드 활용)

목차는 순서만 정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어디에 얼마나 힘을 줄 것인지 결정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가령 40장의 제안서에서 시장과 경쟁사 분석에 20장을 쓰고, 정작 전략을 설명하는 데 4장을 썼다고 해보겠습니다. 분석한 자료는 풍부할 수 있지만 읽는 사람에게는 “그래서 뭘 하겠다는 거지?”라는 인상이 남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저는 목차를 만들 때 각 챕터 옆에 대략적인 페이지 수도 함께 적어봅니다.

몇 장이라는 숫자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전체 페이지를 펼쳐놓았을 때 우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내용에 실제로도 충분한 분량이 배정되어 있는지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전략이 이번 제안의 핵심이라면 전략에 힘이 실려 있어야 하고,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아이디어가 승부처라면 실행안에서 충분한 페이지를 사용해야 합니다. 말로는 중요하다고 해놓고 목차에서는 세 장만 배정되어 있다면, 아직 중요도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셈이죠.

챕터마다 핵심 메시지 한 줄을 미리 씁니다

목차를 만든 뒤에는 각 챕터 아래에 한 줄을 붙입니다. ‘시장 환경이라고만 쓰는 대신 시장의 규모가 아니라 고객의 선택 기준이 달라지고 있다’ ‘타깃 분석 대신 핵심 고객은 가격보다 실패에 대한 부담을 더 크게 느낀다’ ‘전략 아래에는 제품의 장점을 알리는 것보다 선택에 대한 확신을 만들어야 한다’ 이런 식입니다.

이 한 줄은 그 챕터에서 결국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정해주는 기준이 됩니다. 장표를 만들다가 내용이 자꾸 옆길로 새더라도 처음 정한 한 줄을 보면 다시 돌아올 수 있죠. 그래서 저는 오히려 이 한 줄이 잘 써지지 않을 때 조금 더 오래 고민합니다. 한 줄이 써지지 않는 챕터는 아직 할 말이 정해지지 않은 챕터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자료는 충분한데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분석이 덜 된 것이고, 하고 싶은 말은 있는데 근거가 없다면 자료가 부족한 겁니다. 목차를 일찍 만드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디자인을 시작하기 전에 부족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으니까요.

마지막에는 목차만 읽어봅니다

목차는 상대를 결론으로 이끄는 지도다(자료=클로드 활용)

목차가 어느 정도 완성되면 본문을 보지 않고 목차와 한 줄 메시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봅니다.

  • 시장은 이렇게 변하고 있습니다.
  • 그 변화 속에서 이런 고객이 나타났습니다.
  • 그런데 지금 브랜드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핵심 과제로 정의했습니다.
  •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런 전략을 제안합니다.

이렇게 하나의 이야기처럼 이어진다면 어느 정도 흐름이 잡힌 겁니다.

반대로 시장 분석-경쟁사 분석-타깃 분석-인사이트-전략-실행안처럼 각각의 항목은 있지만 앞뒤의 관계가 잘 보이지 않는다면 한 번 더 순서를 고민해봅니다. 좋은 제안서는 모든 페이지가 잘 만들어진 문서이기도 하지만, 앞 페이지의 결론이 다음 페이지를 필요하게 만드는 문서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글에서 PPT를 가장 늦게 켜는 이유는 너무 빨리 완성된 형태로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목차에 시간을 쓰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PPT를 만들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지금 작업하고 있는 한 장에 집중하게 됩니다. 반면 목차를 만드는 동안에는 계속 전체를 보게 됩니다. 무엇을 말할지, 어떤 순서로 말할지, 어디에 힘을 줄지. 이 세 가지가 정해지고 나면 장표를 만드는 일은 오히려 빨라집니다.

목차는 이 문서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려주는 페이지가 아닙니다. 상대를 어디에서 출발시켜 어떤 판단을 거쳐 어떤 결론까지 데려갈지를 정하는 지도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안서를 만들 때 두 번째 장을 꽤 오래 들여다봅니다. 두 번째 장에서 방향이 잡히면, 그다음 페이지부터는 그 방향을 증명하면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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