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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팅

‘딸깍’의 시대, 제안서에 한 단계가 더 필요한 이유 [기획의 기술 ①]

‘이미 채워진 장표’가 주는 문제

‘먹히는 제안서’는 뾰족한 기획에서 시작합니다. 방대한 기업 자료에서 핵심 메시지를 찾아 제안서로 만드는 과정은 매 순간이 판단의 연속인데요. 19년간 카피라이터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한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 디렉터 마녹이 현장에서 쌓은 기획의 기술을 소개합니다.

벌써 10월입니다. 한 해를 정리할 시기지만 마케터에게는 오히려 새 시즌이 시작되는 때죠. 이맘때부터 비딩 이야기가 하나둘 들리고 제안 참여를 요청하는 인비테이션이 메일함에 쌓이기 시작하니까요. ‘이번 제안서는 또 어떻게 쓰지?’ 하는 고민의 계절이 다시 돌아온 겁니다. 

그래도 요즘은 그 고민의 무게가 조금 가벼워진 것도 사실입니다. AI에게 클라이언트 정보와 RFP 파일만 넣어도 목차가 나오고 페이지별 구성이 나오고, 어울릴 만한 도식과 이미지 아이디어까지 금세 받아볼 수 있죠. 그야말로 ‘딸깍’ 하면 ‘뚝딱’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만든 초안을 그대로 제출할 수 있을까요? 아마 대부분의 마케터는 아직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을 겁니다. 틀린 내용은 없는데 누가 봐도 AI가 만든 것 같고, 페이지는 꽉 차 있는데 읽고 나면 남는 게 없는 제안서. 저는 그 이유가 AI의 능력보다 순서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순서의 문제는 AI 이전에도, 제안서를 PPT부터 켜고 시작할 때 똑같이 일어나던 일이었습니다.

제안서 3단계: 워드-스토리보드-PPT

저 역시 제안서 작업에 AI를 적극적으로 씁니다. 전문적인 자료를 찾거나 더 많은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 문장을 검토하거나 이미지를 합성할 때도요. 그럼에도 제안서를 만들 때 가장 늦게 켜는 프로그램은 여전히 PPT입니다. 저는 제안서 작업을 세 단계로 나눕니다. 워드에서는 구성하고, 스토리보드에서는 기획하고, PPT에서는 디자인합니다.

1. 워드로 구성을 짠다

워드로 제안서 구성을 짤 땐 말이 되든 안 되든 일단 끝까지 써본다(자료=클로드 활용)

첫 번째, 워드에서 구성합니다. 이 단계에서는 페이지를 나누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설명하듯 처음부터 끝까지 쭉 써봅니다. 영역을 구분하기 위해서 숫자 정도만 붙이죠. RFP에서 클라이언트의 목표와 니즈는 무엇인지, 경쟁 상황은 어떤지, 브랜드 현황은 어떤지, 그래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전략은 무엇인지. 말이 되든 안 되든 일단 끝까지 씁니다. 그야말로 브레인 덤프입니다.

다 쓴 원고는 출력해서 다시 읽습니다. 이때 확인하는 건 문장의 완성도가 아니라 전체의 흐름입니다. 화면에서는 자연스러웠던 이야기가 종이 위에서는 어색하게 읽힐 때가 있거든요. 출력한 내용을 쭉 보면서 순서를 바꾸거나 부족한 설명을 덧붙이고, 없어도 되는 내용은 과감하게 지웁니다. 문장 사이에 화살표를 긋고, 문단을 통째로 옮겨 붙이기도 하고요.

이 원고는 팀과 함께 일할 때도 쓸모가 큽니다. 백지의 공포는 누구에게나 있으니까요. 원고를 공유하면 팀원들은 빈 화면 대신 출발점을 갖게 됩니다. ‘이런 흐름으로 구성하면 되겠구나’ ‘리더는 이런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구나’를 먼저 알 수 있는 거죠. 디자인에 시간을 쓰기 전에 방향을 맞출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전체 일정이 훨씬 안정됩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바로 PPT로 넘어가지는 않습니다.

2. 손으로 스토리보드를 그린다

두 번째, 스토리보드에서 기획합니다. 제가 쓰는 스토리보드 노트는 한 페이지가 여덟 칸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한 칸을 PPT 한 장이라고 생각하고 각 장에 무엇을 담을지 손으로 그려봅니다. 그러면 질문이 달라집니다. ‘이 내용이 정말 한 장에 들어갈까?’ ‘이 장에서 가장 크게 보여줘야 할 건 뭘까?’ ‘텍스트로 힘을 줄까, 도식으로 구조를 보여줄까?’

그리다 보면 원고에서는 몰랐던 것들이 드러납니다. 글에서는 한 문단이면 충분했던 시장분석이 막상 장표로 옮기면 세 장으로 늘어나기도 합니다. 데이터와 해석과 인사이트를 한 장에 몰아넣으면 아무것도 읽히지 않으니까요. 반대로 세 장은 필요할 것 같았던 실행 계획이 하나의 로드맵으로 정리되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 페이지 수와 순서가 다시 바뀌거나 한 장 안에서 무엇이 헤드라인이 되고 무엇이 근거가 될지 정보의 위계도 함께 정해집니다.

손으로 스토리보드를 그리는 이유는 너무 빨리 완성된 형태로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다(자료=클로드 활용)

여덟 칸을 한눈에 펼쳐 볼 수 있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PPT 화면에서는 한 번에 한 장씩만 보이지만 노트 위에서는 여러 장의 흐름이 동시에 보이거든요. 텍스트가 빽빽한 장이 연달아 이어지는 구간, 비슷한 도식이 반복되는 구간, 정작 힘을 줘야 할 핵심 제안이 평범한 한 장에 묻혀 있는 구간이 금방 눈에 들어옵니다. 제안서도 결국 한 편의 프레젠테이션이라 강약의 리듬이 필요합니다. 숨 고르는 장과 힘을 주는 장이 어디에 놓일지를 이 단계에서 미리 설계해 두는 거죠.

손으로 그리는 이유는 손이 PPT보다 좋은 도구라서가 아닙니다. 너무 빨리 완성된 형태로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PPT를 먼저 켜면 ‘이 한 장을 어떻게 채울까’만을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익숙한 레이아웃과 뻔한 도식에 기대게 됩니다. 팀이 파트를 나눠 바로 장표 작업에 들어가면 각 파트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요. 아직 무엇을 말할지 충분히 정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보여줄지를 먼저 고민하게 되는 거죠.

AI 초안이 아쉬운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AI는 정보를 빠르게 정리하고 그럴듯한 형태를 만드는 데 탁월합니다. 하지만 그만큼 가장 익숙한 구조로 너무 빨리 데려갑니다. ‘무엇을 말할지’를 고민할 틈 없이 ‘이미 채워진 장표’부터 받아 들게 되는 겁니다. PPT부터 켜는 제안서와 같은 함정이죠.

3. PPT로 디자인 작업

세 번째, PPT에서 디자인합니다. 이쯤 되면 PPT를 켜는 일이 훨씬 가벼워집니다. 무엇을 말할지와 어떤 순서로 이해시킬지가 이미 정해져 있으니, 이제는 그것을 가장 잘 보이게 만드는 일에만 집중하면 되니까요. 원고에 있는 길고 짧은 문장은 임팩트 있는 한 줄 헤드라인으로 만들고 스토리보드에 그려둔 구조는 도식으로 정리하고 강조할 숫자는 크게 키웁니다. 디자인의 기준이 ‘예쁜가’가 아니라 ‘이 장의 역할을 하고 있는가’가 되는 거죠. 같은 시간을 들여도 결과물의 밀도가 달라지는 이유입니다.

생각과 표현 사이의 ‘쉼표’

AI도 이렇게 단계에 맞춰 다르게 씁니다. 구성 단계에서는 제 원고의 빈틈을 찾아주는 상대로 씁니다. 이 논리에서 클라이언트가 가장 먼저 반박할 지점이 어디인지 물어보는 식이죠. 기획 단계에서는 제가 그린 구조의 대안을 받아봅니다. 같은 내용을 다르게 묶는 방법이 있는지 확인하는 거예요. 그리고 디자인 단계에 와서야 비로소 제작을 돕는 도구로 씁니다. 판단은 제가 하고 속도는 AI에게 빌리는 셈입니다.

물론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이 저처럼 꼭 워드를 쓰고 종이에 출력하고 손으로 스토리보드를 그려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 과정이 너무 복잡하게 느껴질 수도 있죠. 디지털 노트를 써도 되고 다른 툴을 써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건 도구가 아니라 생각과 표현 사이에 한 단계를 두는 것입니다.

AI 덕분에 제안서를 만드는 속도는 분명 빨라졌습니다. 그럴수록 기획자가 해야 할 일은 오히려 더 선명해집니다. 무엇을 넣을지보다 무엇을 뺄지, 한 장을 어떻게 꾸밀지보다 왜 이 장이 필요한지, 그리고 각각의 페이지보다 전체가 어떤 이야기로 읽혀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제안서를 만들 때 PPT를 제일 나중에 켭니다.

  • 에디터장준영 (zzangit@ditod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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