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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면 계속하세요” 낙서에서 시작된 황효선 작가의 모험

뉴욕타임스가 주목한 일러스트레이터


손 가는 대로 이은 선이 문득 하나의 그림이 되는 순간. 그것을 ‘낙서’라고 부른다. 이 화풍의 묘미는 역시 예측 불가능성이다. 최초의 점으로부터 선이 뻗어나갈 때, 그 선의 꼬리를 물고 다음 선으로 이어질 때도 쉽사리 결과물을 예단할 수 없다. 그래서일까. 목적 없는 점, 선, 색이 마침내 어떠한 형태를 갖춰 눈앞에 나타나면 생각지 못했던 반가움과 즐거움을 선사받기도 한다. 교과서 끄트머리가 낙서로 채워지는 건 어쩌면 이 뜻밖의 감정을 만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모든 작업을 낙서에서 출발하는 작가가 있다. 그에게 낙서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자 도전하는 삶에 대한 은유이자, 세상에 파스텔톤 온기를 전하는 방식이다. 뉴욕타임스 선정 ‘2022년 가장 기억에 남는 일러스트레이션’에 이름을 올린 5년 차 일러스트레이터 황효선의 이야기다.

낙서에서 시작된 모험

Spooky(자료=작가)

황효선 작가의 행보는 낙서의 속성처럼 예측 불가의 연속이었다. 집 안 벽을 온통 그림으로 채웠던 꼬마가 뉴욕 예술대학으로 유학을 떠나고, 뉴욕 거리에 작품을 전시하는 프로 작가가 되기까지. 그는 현재 국제예술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한편, 그림 작가로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독자분들에게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일러스트레이터 황효선입니다. 2022년 에디토리얼 일러스트레이션을 시작으로 광고, 삽화, 이모티콘, 굿즈 제작 등 하고 싶은 일들에 도전하고 있어요. 제 그림을 통해 세상에 따뜻한 온기를 전하고, 사람들의 일상 곳곳에 재미있고 유니크한 감성이 함께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작업하고 있습니다.

작가님의 작품에서 어린 시절 공책에 그렸던 그림들이 떠오르더군요. 언제부터 그림을 그리셨나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정말 좋아했어요. 네다섯 살 무렵 앨범을 보면 벽면 한쪽이 온통 제 낙서로 가득 찬 사진이 있을 정도예요. 부모님께서 제 창작 욕구를 이해하고 마음껏 그리게 배려해 주셨던 것 같아요. 초등학생 시절엔 소심하고 조용한 성격이었는데, 친구들에게 캐릭터를 그려주거나 원하는 그림을 그려주며 주목받는 게 제 소통방식이었어요. 직접 상상해서 그린 만화를 친구들끼리 돌려보기도 했죠. 그렇게 낙서하듯 그려오다 대학 입시 시기에 맞춰 학원에서 진지하게 미술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Pond(자료=작가)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다 미국 뉴욕 School of Visual Arts로 유학을 떠났어요. 유학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한국 대학에서 판화를 전공했었어요. 모델 드로잉도 해보고 조각도 배우며 즐거웠지만, 그 당시엔 저의 낙서 같은 그림체를 표현하는 데 딱 맞는 전공은 아니었다고 생각했죠. 제 스타일을 더 재미있게 펼칠 수 있는 곳을 찾고 싶었어요. 그러다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떠난 한 달간의 유럽 여행이 터닝포인트가 됐어요. 성인이 되어 처음 스스로 계획해 떠난 여행에서 세상이 정말 넓다는 것을 체감했죠. 외국어로 소통하는 즐거움에도 눈을 떴고요.

이후 할아버지를 모시고 고모와 작은 아버지가 지내시는 미국에 방문했는데, 더 넓은 세상과 연결되는 느낌이 정말 좋았습니다. 마침 두 분이 “미국에서 미술을 제대로 배워보지 않겠냐”고 권유해 주셔서 유학에 도전하게 됐어요.

뉴욕에서 배운 것들 중 특히 기억에 남는 경험이 있나요?

‘서페이스 디자인(Surface Design)’ 수업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물체의 표면에 패턴과 질감을 설계하는 작업인데요. 2D 화면 속에만 존재하던 제 그림을 커튼, 옷, 패키지에 적용해 보면서, 끄적였던 그림들이 사람들에게 쓰이는 제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큰 흥미를 느꼈습니다. 이때의 경험이 굿즈 작업을 지금까지 이어오는 계기가 됐어요.

또 무작위로 선정된 단어를 표현하는 ‘라이프 일러스트레이션(Life Illustration)’ 수업을 통해 특정 주제를 어떻게 뻔하지 않고 나만의 시선으로 풀어낼지 치열하게 고민하게 됐어요. 그 시간이 현재 제 작업 방식의 뼈대가 됐죠.

뉴욕을 수놓은 다정한 낙서

<How to Feel Better Naked>(자료=Illustration for The New York Times, 2022)

School of Visual Arts 졸업 후 한 달 만에 뉴욕타임스에서 연락이 왔다. 기사 커버 이미지를 의뢰한다는 요청이었다. 마지막 학기, 학생들의 작품을 보기 위해 학교에 방문했던 뉴욕타임스 아트 디렉터의 시선이 그의 그림에 오래 머물렀던 결과였다.

그에게 주어진 기사는 「How to Feel Better Naked(옷을 벗었을 때 기분이 좋아지는 법)」. 사회적 미의 기준에서 벗어나 자신의 신체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도록 정서적 가이드를 제시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한 공간에 다양한 모습의 맨몸들을 담아내기로 했다. 특유의 자글자글한 선으로 저마다 다른 몸의 굴곡을 표현했다. 몸에 대한 존중을 담은 이 작품은 뉴욕타임스의 ‘2022년 가장 기억에 남는 일러스트레이션’ 중 하나로 선정됐다.

「How to Feel Better Naked」, 기사의 커버 이미지를 그리면서 가장 깊이 고민했던 지점은 무엇이었나요?

미디어 속 이상적인 신체상에 익숙해진 나머지, 정작 우리 자신의 순수한 몸을 거부하게 되는 인식의 문제를 어떻게 그림으로 풀어낼지 고민이 많았어요. 기사는 몸을 ‘판단’의 대상이 아닌 ‘경험’의 주체로 바라볼 때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죠. 요리하고, 태닝하고, 수영하는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내 몸이 올바르게 작동하고 있음을 느끼고, 그 기억으로 나를 사랑하게 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림 안에 인종과 연령은 물론 노화된 몸, 임신한 몸, 튼살이나 흉터가 있는 몸까지 최대한 다양한 모습들을 담아냈어요. 저마다 다른 삶의 흔적을 가진 모든 몸이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사실 평소 동경하던 매체와의 협업이라 긴장도 많이 했지만, 주변 친구들과 교수님께 조언을 구하며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작가님의 <뉴욕의 사계절>은 뉴욕 공공 인프라인 ‘LinkNYC’에 전시되기도 했죠. 한 도시의 사계절을 그리며 작가님의 시선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풍경은 어디였나요?

항상 ‘사람’에게 관심이 많아요. 더군다나 뉴욕은 다양한 인종과 뚜렷한 개성이 모인 도시잖아요. 사람들의 패션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영감을 얻을 수 있었죠. 특히 뉴욕의 사계절을 그리면서 뻔한 관광지보다는 실제 뉴요커들이 사랑하는 장소와 특징적인 순간들에 집중했어요. 예를 들어, 여름의 뉴욕 지하철은 덥고 악취가 나지만 동시에 가장 활기차고 기상천외한 일들이 벌어지는 곳이기도 해요. 기둥을 잡고 춤을 추거나 바닥을 기어다니는 사람을 볼 수도 있죠. 그런 생동감을 여름의 풍경으로 담았고, 봄에는 공원, 가을에는 갤러리 등 계절마다 뉴욕 특유의 감성이 두드러지는 장소들을 선정해 작업했습니다.

익숙함에서 찾는 낯선 매력

대상의 전형화된 이미지에서 벗어나 유쾌한 ‘반전’ 매력을 그리려 한다는 황효선 작가. 그의 작품에선 공주도 고양이도, 어른도 아이도 뻔하지 않다. 하지만 관념을 깨고 새로운 면을 찾는 일은 가만히 앉아서 되지 않는다. 대상을 향한 세심한 관찰과 더불어 사고를 전환할 낯선 경험이 필요하다. 그리고 관찰과 경험의 단상들을 기록하는 수단은, 황효선 작가에게 언제나 낙서였다.

Ladybug(자료=작가)

일상의 풍경뿐만 아니라 동화 같은 장면들도 많이 그리시잖아요. 작품의 영감은 어디서 얻나요?

물체의 외형적인 특징에서 자극을 받는 편이에요. 사물에서 발견한 작은 특징을 저만의 방식으로 비틀거나 강조하는 데서 재미를 느끼죠. 너무 전형적이거나 귀엽기만 한 것보다는, 살짝 ‘반전’이 있는 표현을 선호해요. 공주를 그리더라도 익숙한 드레스 대신 신체 비율을 독특하게 과장하거나 헤어스타일에 변화를 주어 유니크함을 더하는 식이죠. 관찰 대상의 특징이 눈이라면, 그 눈의 사이즈나 속눈썹의 느낌을 시각적으로 과감하게 강조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작업 방식도 궁금해요.

모든 작업은 늘 ‘낙서’에서 시작해요. 그래야 제 안의 것들이 솔직하게 나타나기 때문이죠. 여행을 가거나 집 근처 카페를 가더라도 항상 스케치북을 가지고 다니며 인상적인 장면들을 스케치해요. 나중에 작품이 될 수 있는 소스들을 수집하는 거죠. 아무리 바빠도 낙서는 거르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그렇게 그린 낙서를 그대로 스캔한 뒤 그 위에 트레이싱하며 작품을 디벨롭해요. 수채화의 경우 빈 종이에 스케치 없이 바로 그리기도 해요. 곧바로 물감을 사용하다 보니 펜으로 그리는 기존의 그림체와 조금 달라질 수 있지만 그때 느낄 수 있는 선의 느낌에 만족하곤 합니다.

작가님 작품에선 디지털의 정교함과 수채화 같은 아날로그의 따뜻함이 동시에 느껴져요. 두 매체를 다루는 작가님만의 방식이 있나요?

사실 최근에 아날로그 감성을 되찾는 데 집중하고 있어요. 대학 생활 내내 아날로그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었는데 일을 시작하면서 디지털 작업에 몰두했었거든요. 동시에 디지털 작업으로 구현할 수 있는 표현들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두 방식을 어떻게 결합할 수 있을지 연구하는 중입니다. 디지털 툴로 그림을 그릴 땐 텍스처부터 이미지 배치까지 모든 구성 요소를 의도해야 해요. 반면 아날로그 방식으로 그리다 보면 우연한 실수가 매력적인 결과물이 되기도 하죠. 각각의 장점을 섞는다면 재밌는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요?

Untitled_Artwork 10(자료=작가)

창작 활동을 하다 보면 아이디어가 고갈되거나 작업이 막히는 순간도 있을 것 같아요.

작업이 막힐 때는 감정이 메말라 있거나 스스로 안주하고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요. 그럴 땐 익숙한 환경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거나 감정을 건드리는 영화를 보며 새로운 시각적 자극을 받아요. 낯선 풍경에선 무엇이든 다르게 보이잖아요. 아직 그려보지 못한 것들이죠. 마치 세상에 나온 게 처음이라 모든 걸 설레고 신기하게 바라보는 어린아이의 눈이 되는 것 같아요.

최근에는 작년에 다녀온 발리와 치앙마이가 큰 힘이 되었어요. 사계절 중 여름을 가장 좋아하는데, 두 곳에서 본 날 것의 여름 풍경이 인상적이었거든요. 과감한 패턴과 색으로 꾸민 가게들도 많이 보았고요. 여행지에서의 두근거렸던 감정들, 즐거웠던 경험들을 나중에 책상 앞에 앉아 떠올리면,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어져요.

여름을 좋아하시는군요. 마침 여름의 시작인 6월에 발행될 285호 표지를 제작하셨어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나요?

285호 표지의 주제는 ‘5월의 아이가 6월의 아이를 만났을 때’입니다. 5월에서 6월로의 이동은 봄에서 여름으로 계절이 바뀌는 큰 변화라고 생각해요. 여름이 봄을 향해 다가올 때, 불어오는 바람의 설렘과 시원함을 떠올리며 그렸어요. 초여름의 싱그러움이 모두에게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좋아하면 믿고 계속하세요”

국제예술학교에서 중고등학생 대상으로 2년째 기초 미술과 디지털 일러스트 등을 가르치고 있는 황효선 작가는 최근 아동도서 『오늘 내 마음에 어울리는 말』도 출간했다. 그가 그림작가로 참여한 책으로, 초등학생들이 겪는 복잡미묘한 감정의 어휘를 다룬다. 아이들의 감정을 그리며 작은 차이도 포착하고자 거울 앞에서 표정 연기를 하기도 했다.

Message(자료=작가)

그는 여전히 하고 싶은 것이 많다. 앞으로 도전하고픈 일이 있냐는 질문에 네이버 스페셜 로고 작업과 의류 브랜드 협업을 꼽으며, 사람들의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고 고백한 그는 이어 언젠가 가게를 열고 싶다는 마음도 내비쳤다. 작품을 판매하는 한편 사람들과 어울려 그림도 그리는 복합 공간을 꿈꾼다고.

멈추지 않는 도전으로 예측 불가능한 행보를 이어온 황효선 작가는 일러스트레이터를 꿈꾸는 이들에게도 응원의 목소리를 보낸다. “좋아하면 믿고 계속하라”는 담백하지만 솔직한 조언이다.

“유행을 따르기보다 내면을 들여다보며 진짜 좋아하는 걸 찾는 시간을 가지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림만 그려서는 나를 알 수 없으니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발견해야 하죠. 저 역시 늘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지만, 실패조차 나를 쌓아가는 기반이라 믿고 계속하는 힘이 중요합니다. AI 시대일수록 대체 불가능한 자신만의 특징이 드러나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고유의 목소리로 멈추지 않고 그려야 해요. 좋아한다면 그 마음을 믿고 꾸준히 해나가세요. 결국 알아주는 사람은 반드시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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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터최석영 (csyeong720@ditod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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