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이라서요”는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기획의 기술 ③]
아이디어를 제안으로 만드는 법
‘먹히는 제안서’는 뾰족한 기획에서 시작합니다. 방대한 기업 자료에서 핵심 메시지를 찾아 제안서로 만드는 과정은 매 순간이 판단의 연속인데요. 19년간 카피라이터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한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 디렉터 마녹이 현장에서 쌓은 기획의 기술을 소개합니다.

‘기획의 기술’ 1편에서는 PPT를 켜기 전에 전체 이야기를 정리하는 방법을 이야기했습니다. 2편에서는 목차로 설득의 순서를 만드는 방법을 다뤘고요. 이번에는 제안서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 보려 합니다. 그 안에 담을 아이디어를 상대가 납득할 수 있는 제안으로 만드는 방법입니다.
‘딸깍’의 시대, 제안서에 한 단계가 더 필요한 이유 [기획의 기술 ①]
‘이미 채워진 장표’가 주는 문제
제안서는 두 번째 장에서 결정납니다 [기획의 기술 ②]
목차는 순서가 아니라 지도입니다
최근에 제안을 준비하면서 팀원들과 여러 아이디어를 논의했습니다. “이런 거 해보면 좋을 것 같더라구요”라는 말이 나오면 저는 그다음 설명을 기다립니다. 우리가 왜 이걸 해야 하는지, 이번 제안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 말이죠. 그런데 종종 설명이 “요즘 이런 게 유행이라서요”에서 끝납니다. 물론 트렌디한 것도 중요합니다. 다만 그 ‘트렌디함’이 이번 제안에 필요한지, 필요하다면 왜 필요한지는 한 번 더 생각해봐야 합니다.
아이디어가 먼저 떠올라도 괜찮습니다

보통 아이디어가 이유보다 먼저 떠오르죠. 재미있게 본 콘텐츠가 생각나기도 하고, 다른 브랜드의 캠페인을 보다가 “우리도 이런 거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니까요. 모든 아이디어가 분석과 전략을 차례로 거쳐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떠오른 생각도 충분히 기획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이후에는 이 아이디어를 우리 상황에 놓고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아이디어로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사람들이 왜 반응할 거라고 생각하는지 따져보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아이디어가 더 구체적으로 발전되기도 하고, 재미있긴 하지만 이번 제안에는 맞지 않는다는 판단이 서기도 합니다. 이 단계부터 거창한 조사나 대단한 숫자를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무엇이 필요하고, 이 아이디어가 거기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부터 설명해보면 됩니다.
예를 들어 고객의 참여를 늘리는 것이 목표인 생활용품 브랜드의 채널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제품의 기능과 사용법을 소개하는 게시물은 꾸준히 올리지만, 고객에게 의견을 묻는 콘텐츠는 거의 없습니다. 이 채널에 두 가지 선택지를 주고 답을 고르게 하는 콘텐츠를 제안한다고 해보죠.
“요즘 이런 투표형 콘텐츠를 많이 하더라구요. 우리도 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어떤 콘텐츠를 만들겠다는 것인지는 알 수 있습니다. 레퍼런스까지 붙이면 완성된 모습도 쉽게 그려집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채널에 왜 필요한지는 여전히 알기 어렵습니다. 여기에 “고객의 참여를 유도해 브랜드 친밀도를 높일 수 있습니다”라는 문장을 붙여봐도 의문은 남습니다. 여러 참여 방식 중에서 왜 이 방식을 골랐는지, 고객은 무엇 때문에 참여할지에 대한 설명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채널에는 제품을 설명하는 콘텐츠가 많고 고객에게 의견을 묻는 콘텐츠는 적습니다. 댓글을 남길 계기를 만들되, 처음부터 긴 의견이나 사진을 요구하면 참여에 부담을 느낄 수 있습니다.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는 질문으로 가볍게 말을 걸어보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어떨까요. 어려운 용어나 특별한 자료가 추가된 것은 아닙니다. 현재 채널에서 관찰한 점과 참여 방식에 대한 판단을 연결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왜 이 아이디어를 제안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긴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어 올리는 것에 비해, 주어진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는 일은 준비할 것이 적습니다. 이 차이가 해당 형식을 선택한 이유가 되는 것이죠.
왜 이 방법인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선택한 이유가 분명해지면 콘텐츠에 담을 내용도 구체적으로 정할 수 있습니다. 생활용품 브랜드라면 “집에서 정리하기 가장 막막한 곳은 옷장인가요, 주방인가요?”처럼 고객의 생활과 관련된 질문을 던질 수 있겠지요. 답변을 받은 뒤에는 많이 선택한 공간의 정리 방법을 다음 콘텐츠로 소개할 수도 있습니다. 고객이 남긴 의견으로 다음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브랜드와 아무 관련 없는 질문으로 댓글만 모은다면, 그다음에 무슨 이야기를 할지는 다시 고민해야 합니다. 같은 투표형 콘텐츠라도 무엇을 묻고 답변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역할이 달라집니다. 왜 이 아이디어를 선택했는지 생각하는 과정이 실제로 무엇을 만들지 결정하는 데에도 영향을 주는 셈이죠.
물론 이렇게 설명해도 누군가는 물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댓글이 무조건 늘어나나요?” 실제 반응은 해봐야 알 수 있습니다. 다만 무엇을 기대하고 이 방식을 택했는지 알고 있다면, 실행한 뒤 무엇을 살펴봐야 할지도 분명해집니다. 사람들이 질문에 반응했는지, 어느 선택지에 관심을 보였는지, 다음 콘텐츠에서도 이야기를 이어갔는지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반응이 적었다면 질문이 어려웠는지, 선택지가 공감되지 않았는지부터 돌아볼 수 있습니다.
제안서에 이 과정을 모두 길게 써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상대가 고개를 끄덕일 만큼만 설명할 수 있으면 됩니다. “고객의 참여를 높이겠습니다”라는 말에서 조금 더 들어가 “지금은 의견을 말할 계기가 적으니 답하기 쉬운 질문부터 건네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정도로도 제안은 훨씬 선명해집니다.
저는 팀원들에게 회의에서 이런 설명을 듣고 싶다고 말합니다.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현재 상황을 어떻게 봤고, 왜 이 방법이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는지 말입니다. 그 생각을 알아야 아이디어를 함께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참여 부담을 줄이려는 것이라면 질문을 더 쉽게 다듬을 수 있고, 고객의 고민을 듣고 싶은 것이라면 어떤 선택지를 줘야 할지 논의할 수 있으니까요.

당연히 판단의 바탕이 되는 사실은 직접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 고객은 이런 형식을 좋아합니다”라고 말하려면 실제 고객의 반응을 살펴봐야 합니다. 타깃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요즘 사람들은 다 이렇다”고 설명하면 오히려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일상적인 경험만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설명도 있지만, 자료를 확인해야 말할 수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료가 많을수록 설명이 좋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가끔은 아이디어를 뒷받침할 자료를 찾다가 정작 설명해야 할 문제에서 멀어지기도 합니다. 댓글 참여를 늘리기 위한 제안에 전체 SNS 이용자 수나 콘텐츠 시장의 성장률을 붙이는 식입니다. 그 숫자가 정확하더라도 우리가 이 질문을 해야 하는 이유까지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이번 과제에는 현재 채널의 게시물 몇 개와 실제 댓글이 더 직접적인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유행’도 같은 기준으로 살펴보면 됩니다. 유행하는 형식이라면 사람들이 이미 참여 방법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익숙한 형식을 우리 브랜드가 어떻게 활용했는지 궁금하게 만들 수도 있고요. 주목을 끄는 것이 목표라면 화제성 자체가 선택의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유행을 활용했을 때 이번 과제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 그 안에서 우리 브랜드는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까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자주 빠지는 함정이 있는데요. 이 아이디어만이 유일한 답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는 부담감입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고객의 의견을 듣는 방법만 해도 인터뷰, 설문, 댓글 이벤트 등 여러 가지입니다. 그중에서 현재 채널의 상황과 운영 여건을 고려했을 때 무엇부터 해보는 것이 적절한지 이야기하면 됩니다. 다른 방법을 모두 부정해야 내 아이디어를 선택할 이유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떠올린 순서와 설득하는 순서는 다릅니다

여기까지 생각을 정리했다면 이제 제안서에 담을 차례입니다. 아이디어를 떠올린 순서대로 보여줄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처음 본 레퍼런스가 있어도, 상대에게는 지금 풀어야 할 과제부터 보여주는 편이 좋습니다. 현재 어떤 상황이고, 무엇을 바꿀 필요가 있으며, 그래서 어떤 방법을 제안하는지 순서대로 전달하는 것입니다.
앞부분에서 채널을 분석했다고 해서 뒤에 나오는 아이디어의 이유까지 저절로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분석에서 ‘고객과의 대화가 부족하다’고 짚었다면 실행안을 소개할 때도 그 과제와 연결해줘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는 앞에서 이야기한 문제를 이 아이디어로 어떻게 풀겠다는 것인지 따라올 수 있습니다. 2편에서 이야기한 설득의 순서가 개별 실행안 안에서도 이어지는 것이죠.
아이디어마다 긴 배경 페이지를 붙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소개하는 장표의 첫 문장에 이유를 짧게 담아도 됩니다.
“고객이 부담 없이 의견을 남길 수 있도록, 일상 속 선택을 묻는 질문형 콘텐츠를 제안합니다.”
이 문장이 있으면 뒤에 나오는 예시 이미지와 운영 방식도 이해하기 쉬워집니다. 왜 짧은 답변으로 참여하게 했는지, 왜 제품 설명보다 고객의 생활을 먼저 묻는지 알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유를 설명하다 보면 아이디어의 빈틈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참여 부담을 줄이겠다고 해놓고 가입과 인증을 여러 번 요구할 수도 있고, 고객의 생각을 듣겠다고 해놓고 정답이 정해진 퀴즈만 만들 수도 있습니다. 하려는 말과 실제 실행 방식이 맞지 않는 것입니다. 이럴 때는 참여 방식이나 질문부터 다시 살펴봐야 합니다. 설명을 아무리 매끄럽게 고쳐도 실행 방식이 그대로라면 어긋난 부분은 남습니다.
이처럼 아이디어를 먼저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처음 떠오른 모양 그대로 끝까지 가져갈 필요는 없습니다. 왜 필요한지 따져보는 동안 형식이 바뀌기도 하고 일부만 남기도 합니다. 이번 과제에는 맞지 않아 다른 기회를 기다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고치고 골라내는 과정까지 기획에 포함됩니다.
“왜 이 아이디어여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새롭고 대단하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할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우리가 지금 풀어야 할 과제로 돌아가보면 좋겠습니다. 이 아이디어가 그 과제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알아야 상대도 실행할 만한지, 시간과 비용을 들일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제안서에 아이디어를 넣기 전에 선택한 이유를 먼저 말로 설명해보세요. 어려운 기획 용어 없이도 듣는 사람이 “그래서 이걸 하자는 거군요”라고 이해할 수 있는지 확인해보는 것입니다. 설명하다 막히는 부분이 있다면 그곳을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런 거 해보면 어때요?”는 기획을 시작하기에 좋은 말입니다. 그다음에는 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지 들려주세요. 그 이유를 이해해야 상대도 “그럼 어떻게 해볼까요?”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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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장준영 (zzangit@ditoday.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