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을 붙잡아 산책시키는 사람, 일러스트레이터 김도트
일상의 사소함을 상상으로 바꾸다

달을 한입 베어 먹으면 무슨 맛일까. 실없는 상상이지만, 일러스트레이터 김도트에게는 번뜩이는 영감이었다. 복숭아의 단면이 문득 달처럼 보였고, <달을 한 입 베어먹었다>로 그려냈다.
그의 인스타그램 소개 문구는 세 단어, ‘일상의 관찰과 상상’이다. 짧지만 정확한 설명이다. 모두가 그냥 지나칠 장면에 자신만의 상상을 얹는 일을 몇 년째 계속해 온 그는, 거창한 소재를 찾아 나서는 대신 눈앞의 사소함을 오래 들여다보길 택했다. 그렇게 쌓인 그림이 인스타그램 피드 한 칸 한 칸을 채운다.
이번 호의 주제는 ‘발산경계’다. AI로 여러 경계가 무너지는 동시에 새로운 것이 태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이를 김도트만큼 잘 포착할 작가가 또 있을까. 표지를 장식한 <빨강 인내>는 시인 앤 카슨의 문장 한 줄에서 시작해 화산 그림이 됐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본문에서 살펴본다.
관찰을 상상으로, 상상을 그림으로 바꾸는 그의 작업 방식은 관찰과 기록을 다루는 다른 직군의 실무자에게도 참고가 될 만하다.

관찰에서 상상으로, 상상에서 그림으로
초록빛 웅덩이에 누운 인물, 붉은 과일, 산과 밤하늘, 태양 같은 모티프가 그의 그림에 반복해서 등장한다. 그때그때의 기록이 쌓여 만들어진 사전처럼도 보인다. 그의 그림들은 인스타그램 피드에만 머물지 않는다. 최근에는 정해연 소설가의 책 『내가 죽였다』, 『내가 죽이지 않았다』 표지 작업을 진행했고, 지난 여름 서울일러스트레이션페어에도 부스를 열었다.
Q. 왜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시작하셨나요?
‘상상을 시각화하는 즐거움’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달을 한 입 베어먹었다>는 복숭아를 먹고 있는데 자른 복숭아가 문득 달처럼 보였던 사소한 상상에서 출발했습니다. 이렇게 저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일상적인 사물이나 장면에 저만의 상상을 더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일상 속 작은 관찰과 상상들을 그림으로 그려 소소한 즐거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Q. 작품의 영감이나 아이디어는 주로 어디서 얻나요?
영감이나 아이디어는 대단한 곳에서 오기보다는 정말 벼락같이 불쑥 찾아오는 편입니다. 일상생활을 하다가 문득 찾아오는 순간들이 많아서, 그럴 때는 놓치지 않으려고 꼭 스케치를 해두거나 메모 한 줄이라도 남겨두려고 노력해요. 작업의 시작은 정말 러프한 스케치로 가볍게 시작합니다. 스케치로 밑그림이 잡히고 나면 그때부터는 색감과 분위기에 공을 많이 들입니다.
Q. 지금까지 만든 작품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을 소개해 주세요.
최근 가장 신경 쓰며 애정을 쏟고 있는 작업은 달 산책 시리즈입니다. ‘건물 위에 올라가 달을 잡아 이리저리 산책시킨다’는 상상에서 시작된 이야기예요. 지금도 진행 중인데,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는 짧은 책으로도 꼭 엮어보고 싶습니다.
Q. 반대로 가장 아쉬운 작품은요?
아쉬운 작품도 달 산책 시리즈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잘 마무리 지을까 하는 고민이 큽니다. 작업이 이어지는 만큼 마침표를 잘 찍고 싶다는 생각이 늘 함께합니다.

Q. 작품 제목이 짧은 이야기 같습니다. <바다에 가면 그림자가 길어진다>, <달을 한입 베어먹었다>처럼요. 보통 그림이 먼저인가요, 제목이 먼저인가요?
제목은 작품을 마무리한 후에 붙이는 편입니다. 사실 저는 그림에 제목을 짓는 과정 자체를 무척 좋아해요. 그래서 제목을 떠올리는 속도도 굉장히 빠른 편입니다. 제목을 붙이면 그때 진짜 제 그림이 된 기분이거든요.
다음 장면이 있는 그림
이렇게 이름 붙은 그림은 종종 다음 이야기로 이어진다. <해와 달의 시소>는 아침과 밤 버전으로, <구조>는 오전, 오후, 밤 세 버전으로 존재한다. 같은 장면을 시간을 달리해 다시 그리는 건 김도트만의 시그니처이기도 하다. 하나의 그림으로 끝내지 않고 굳이 다음 장을 그리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Q. <해와 달의 시소>나 <구조> 시리즈처럼 같은 장면을 시간대별로 그린 작품이 많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저는 시리즈로 작업하는 걸 좋아합니다. 멈춰 있는 그림이지만, 다음 장에서 이야기가 계속 이어질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시간 흐름에 따라 그림 속 색이나 장면이 바뀌는 과정을 담아내는 것 자체가 작업하면서 느끼는 즐거움 중 하나입니다. 마치 영화가 끝나고 나오는 쿠키 영상처럼 보는 이에게 작은 즐거움으로 다가가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작업하고 있습니다.

Q. 이번 호 표지는 강렬한 색감의 화산 폭발 장면을 그린 <빨강 인내>입니다. 간단히 소개해 주세요.
<빨강 인내>는 캐나다 시인 앤 카슨(Anne Carson)의 저서 『빨강의 자서전』 속 문장에서 출발한 작업입니다. ‘카메라를 15분 동안 노출한 채로 화산이 폭발하는 장면을 찍었다’라는 내용을 읽었는데 그때 이 화산을 너무 그리고 싶었어요. 화산탄들이 이리저리 날리고 붉은 용암이 흐르는 화산이 머릿속에 그려졌죠. 거기에 색채 해석을 더해 나오게 된 작품입니다.
Q. 이번 호 주제는 발산경계입니다. AI로 인해 많은 경계가 무너지고 동시에 새로운 것이 탄생하고 있다는 의미를 담았는데요. 작가님께서 현재 경험 중인 발산경계는 무엇인가요?
AI는 일러스트 작업을 할 때는 경계심과 두려움을 주지만, 반대로 다른 업무를 할 때는 너무나 편리한 도구예요. 제가 느끼는 가장 큰 발산경계는 ‘새로운 시도’를 쉽게 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에요. 예를 들어 평소에 영상 제작은 엄두도 못 내던 분야였는데, AI 덕분에 문턱이 낮아지면서 처음 제 손으로 영상을 완성할 수 있었어요. 덕분에 제가 할 수 있는 영역이 넓어진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창작’이 분명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사람만이 부릴 수 있는 고집, 그리고 오랜 시간 고민하며 다듬어 완성해 내는 밀도는 AI가 흉내 낼 수 없는 고유의 영역이라 믿습니다.
완성엔 고집을, 시작엔 용기를
인스타그램 피드 밖에서 그를 만날 자리는 많지 않다. 지난 4월 을지로의 갤러리포인트에서 연 개인전 ‘After the Scene’이 그중 하나다. 일상에서 스쳐 지나가는 장면들이 누군가의 마음속에 남기는 잔상을 주제로 삼았다. 화면 안에서 완성되던 그림이 벽에 걸리고 사람들과 마주할 때, 그는 무엇을 느꼈을까.

Q. 지난 4월 개인전 ‘After the Scene’을 여셨습니다.
좋은 기회에 열 수 있었던 뜻깊은 개인전이었습니다. ‘After the Scene’은 일상에서 만나는 무수한 장면 중 유독 생각이 나는 찰나가 있잖아요. 그 순간이 누군가에게는 마음속에 머물러 있는 특별한 잔상일 것이라는 주제로 진행한 전시였습니다. 특히 전시의 마지막 부분엔 엔딩 크레딧 콘셉트의 영상을 만들어봤는데요. 작품 속에 등장했던 요소들을 마치 영화의 등장인물과 스태프처럼 캐스팅 목록으로 적어보았고, 관람객분들도 그 부분을 흥미롭게 봐주셨던 것 같아요.
Q. 작가님에게 팬분들은 어떤 의미인가요?
일 년에 한두 번 일러스트레이션 페어 같은 곳에서 오프라인으로 만날 기회가 생기곤 하는데요. 평소에는 거의 혼자 그림을 그리다 보니, 이렇게 그림을 매개로 사람들과 직접 마주하는 순간이 참 소중합니다. 제 부스에 찾아와 반갑게 인사를 건네주시고, 달달한 간식이나 따뜻한 응원의 말을 건네주시는 팬분들의 모습은 시간이 지나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요. 늘 반갑고 고마운 분들입니다.
Q. 일러스트레이터로서 포기할 수 없는 작가님만의 고집이 있다면요?
완성도에 조금 집착하는 것 같아요. 마음에 드는 그림이 나올 때까지, 원하던 색감과 배치가 맞을 때까지 계속 고치고 다듬으면서 작업을 이어가거든요. 그래서 완성을 못 하고 쌓여있는 작업도 많습니다.
Q. 앞으로 해보고 싶은 작업은 무엇인가요?
앞으로 꼭 해보고 싶은 작업은 디지털을 넘어 ‘원화’로 저만의 그림을 그려보는 것입니다. 주로 디지털 작업을 해왔지만, 붓질이 주는 고유의 결은 정말 매력적이더라고요. 그래서 원화 작업을 시도해 보고 싶습니다.

Q. 비슷한 길을 꿈꾸는 <디지털 인사이트> 독자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늘 이 한마디를 해드리고 싶어요. ‘일단 시작하기’입니다. 너무 진부하지만 저 역시 시작을 참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시작하는 게 무섭다면, 아주 소심하게 남들 모르게 조용히 시작해도 괜찮습니다.
인터뷰는 끝났지만, 그의 ‘달 산책’은 아직 진행형이다. 건물 위로 올라가 달을 잡고, 이리저리 산책시키다가, 언젠가 마침표를 찍는 것. 다른 작품도, 그의 커리어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의 작업장에 새롭게 쌓일 일상들을 기대해 본다.
🔎 김도트 작가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kim.dot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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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장준영 (zzangit@ditod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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