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그마는 왜 AI 시대에 종이 잡지를 출간했을까?
아날로그가 선사하는 느린 고뇌의 가치
생성형 AI 열풍이 가장 먼저 촉발된 분야는 다름 아닌 디자인입니다👩🎨 UX 전문가이자 인공지능디자인협회를 설립, 회장을 맡고 있는 서울미디어대학원 유훈식 교수가 생성 AI 시대에 UI·UX 디자이너가 꼭 알아야 할 이슈, 트렌드를 정리합니다.
최근 디지털 화면 속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펼쳐내던 디자인 툴 피그마(Figma)가 화면 밖 오프라인 세상으로 눈을 돌렸다. 화면 위의 픽셀과 벡터 라인에 익숙한 디자인 생태계에 피지컬 매체인 종이 잡지 ‘Start Anywhere’를 지난 6월 말 출간하며 신선한 파장을 일으킨 것이다.
언제나 최첨단 웹 기술과 실시간 협업 기능으로 디지털 제품 디자인의 혁신을 이끌어온 피그마가 클래식한 인쇄 매체를 선택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많은 디자이너와 크리에이터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이런 시도는 브랜드 홍보용 굿즈를 제작하는 수준을 넘어선다. 디지털 중심의 작업 환경에 익숙해진 현대 디자이너들에게 물리적인 감각을 되살려주고, 화면 너머에 존재하는 디자인의 근본적인 가치를 되짚어보게 만드는 깊이 있는 기획이다. 피그마는 손으로 만져지는 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디지털 세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시각적, 촉각적 경험을 제안하며 브랜드가 지닌 창작에 대한 진정성을 세상에 증명해 보였다.

Start Anywhere 프로젝트 개요
‘Start Anywhere’ 프로젝트는 피그마가 창작자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초대장이자 응원의 메시지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디자인을 시작하는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막연함과 두려움을 해소하고, 거창한 준비 없이도 어디서든 창작을 시작할 수 있다는 용기를 북돋아 주는 데 있다. 프로젝트 이름인 ‘Start Anywhere’ 역시 완벽한 시작점이나 거창한 계획이 없더라도 지금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아이디어를 펼쳐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피그마는 이 프로젝트를 위해 인쇄물 특유의 정교한 레이아웃과 감각적인 그래픽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디지털 작업물에서는 느끼기 힘든 인쇄 매체만의 밀도 높은 아름다움을 구현했으며, 글로벌 크리에이터들의 다채로운 시각과 인터뷰를 단단한 가제본 형태로 엮어냈다. 결과적으로 이 잡지는 한 번 읽고 버려지는 소모품이 아니라, 디자이너의 책상 한구석에 오랫동안 놓여 언제든 영감이 필요할 때 펼쳐볼 수 있는 영감의 창고로 완성되었다.

디지털 디자인 툴과 오프라인 매체의 결합
오늘날의 디자인 환경은 그 어느 때보다 디지털에 편중되어 있다. 디자이너들은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화면을 바라보며 보내고, 마우스 클릭과 키보드 단축키로 수많은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디지털 디자인 툴의 대표 주자인 피그마가 물리적인 종이 잡지를 만든 것은 매우 흥미로운 역설이다.
빛을 발하는 스크린 속 화면은 무한한 수정이 가능하고 빠르게 업데이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손으로 직접 페이지를 넘기며 느낄 수 있는 질감이나 인쇄 먹향이 주는 특유의 오프라인 감성은 제공하기 어렵다. 피그마는 이런 점에 주목했다. 무한히 확장되는 디지털의 자유로움과 인쇄 매체가 가진 물리적 한계성 및 정교함이라는 서로 다른 두 영역을 결합해 새로운 시너지를 창출하고자 했다.
종이의 질감, 인쇄 공정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오차, 페이지를 넘길 때 느껴지는 무게감 등 오프라인 매체만이 가지는 독특한 감각적 요소들은 디지털 화면 속 아이디어를 더욱 입체적이고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 결합은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며 창작의 깊이를 더해줄 수 있는 훌륭한 파트너가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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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에 담긴 콘텐츠와 메시지
잡지 ‘Start Anywhere’의 내부를 채우고 있는 콘텐츠들은 창작자들의 실전 경험과 고민, 그리고 깊은 통찰로 가득 차 있다.
잡지에는 세계 각지에서 활약하는 디자이너, 아티스트, 기획자들의 다채로운 이야기와 그들의 실제 작업 프로세스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성공적인 완성품만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결과물에 도달하기까지 거쳤던 수많은 시행착오와 혼란스러운 아이디어 스케치, 낙서에 가까운 초안들까지 솔직하게 공개한다.
이를 통해 잡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모든 위대한 디자인도 처음에는 보잘것없고 정돈되지 않은 작은 아이디어에서 시작한다는 점이다. 완벽한 결과물 뒤에 숨겨진 솔직한 창작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잡지는 독자들에게 완벽주의라는 부담감을 내려놓고 ‘일단 무엇이든 시작해 보라’는 강렬한 메시지를 전한다.
타인의 완성된 포트폴리오를 보며 주눅 들기 쉬운 초보 디자이너나 정체기를 겪고 있는 전문 디자이너 모두에게 이 콘텐츠들은 따뜻한 위로이자 강력한 창작의 동력으로 작용한다.

피그마가 전달하고자 한 창작 철학
피그마가 이번 종이 잡지 프로젝트를 통해 전하고자 한 핵심 창작 철학은 ‘디자인의 대중화’와 ‘창작 과정의 즐거움’이다. 피그마는 창작이란 일부 선택받은 천재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아이디어를 가진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열린 과정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복잡한 설치 과정 없이 웹 브라우저만 있으면 어디서나 접속해 함께 화면을 그리며 협업할 수 있는 피그마의 제품 정체성처럼, 창작에 대한 진입 장벽을 낮추는 것이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다. 잡지 ‘Start Anywhere’는 이런 피그마의 신념을 물리적 공간으로 확장한 결과물이다.
처음부터 완벽한 가이드라인을 세우고 시작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 일단 캔버스 위에 선 하나를 긋는 행위 자체가 창작의 위대한 첫걸음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디자인을 거창한 결과물 중심이 아닌, 아이디어를 탐구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유연하고 즐거운 여정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피그마가 잡지를 통해 세상에 퍼뜨리고자 한 창작 철학의 본질이다.

주요 콘셉트: ‘왕복 여행 (Round Trip)’
‘Start Anywhere’ 프로젝트를 관통하는 가장 주요한 기획 콘셉트 중 하나는 바로 ‘왕복 여행(Round Trip)’이다. 왕복 여행은 디지털 세상에서 출발해 오프라인의 아날로그 세상을 경험한 뒤, 그곳에서 얻은 영감과 감각을 가지고 다시 디지털 세상으로 돌아오는 순환적 과정을 의미한다.
현대의 디자이너들은 대부분 디지털 캔버스 안에서 생각을 시작하고 디지털 매체로 결과물을 완성하는 일방통행식 작업 패턴에 갇혀 있기 쉽다. 피그마는 잡지라는 오프라인 매체를 거치는 여행을 통해 이 단조로운 흐름을 깨뜨리고자 했다.

디지털 화면을 떠나 손으로 직접 종이를 만지고, 인쇄된 그래픽을 감상하며 물리적인 책을 읽는 과정은 디자이너의 감각을 깨우는 아날로그적 여정이 된다. 오프라인에서의 감각적 자극과 경험은 디자이너의 사고를 한층 확장해 주며, 머릿속에 새로운 아이디어의 씨앗을 심어준다. 그리고 이렇게 아날로그 세상에서 충전한 풍부한 감수성과 영감을 가지고 다시 디지털 화면 앞 작업 공간으로 돌아왔을 때, 디자이너는 이전보다 훨씬 깊이 있고 창의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 결국 ‘왕복 여행’ 콘셉트는 디지털과 아날로그 매체를 유기적으로 오가며 창작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새로운 디자인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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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스튜디오 ‘노 아이디어스(No Ideas)’ 참여
이 특별한 종이 잡지 프로젝트가 독보적인 완성도와 감각적인 비주얼을 갖출 수 있었던 데에는 디자인 스튜디오 ‘노 아이디어스(No Ideas)’의 참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노 아이디어스’는 독창적인 기획력과 실험적인 시각 언어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는 크리에이티브 스튜디오다. 역설적인 그들의 이름과 달리, 이들은 매번 기발하고 파격적인 아이디어로 매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작업을 선보여 왔다.


‘노 아이디어스’는 이번 프로젝트에서 그래픽 레이아웃 작업 그 이상을 고민했다. 기획 단계부터 깊이 관여하여 물리적 매체가 줄 수 있는 매력을 극대화했다. 이들은 종이의 재질 선택부터 타이포그래피의 배치, 컬러의 조합, 그리고 가제본 형태의 제본 방식에 이르기까지 잡지 전체를 하나의 완성도 높은 예술 작품으로 디자인했다.
디지털 툴 브랜드인 피그마가 가진 현대적이고 명쾌한 이미지에 ‘노 아이디어스’ 특유의 위트 있고 실험적인 아날로그 감성을 접목함으로써,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감각적인 스타일의 종이 잡지를 탄생시켰다. 이들과의 협업은 피그마의 브랜드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더욱 강력하고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데 기여했다.
AI 시대에도 중요해지는 디자인의 본질 성찰
인공지능 기술이 급격히 발전함에 따라 버튼 하나만 누르면 몇 초 만에 수십 가지의 화려한 그래픽과 레이아웃이 자동으로 생성되는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AI 시대를 살아가는 디자이너들에게 기술의 발전은 편리함을 주는 동시에, ‘디자이너의 역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복잡하고 화려한 시각적 결과물을 만드는 일 자체는 점차 AI가 대체할 수 있는 영역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점에서 피그마가 선보인 종이 잡지 프로젝트는 디자이너들에게 매우 중요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하고 자동화되더라도 대체될 수 없는 디자인의 본질은 결국 ‘사람의 감정과 경험’, 그리고 ‘문제를 바라보는 비판적 시각과 질문하는 능력’에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손으로 직접 만져지는 종이 잡지라는 아날로그 매체는 AI가 제공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감각적 경험과 깊은 몰입감을 선사한다.
“인터페이스는 죽지 않는다” 피그마가 본 디자인 툴의 미래
유키 야마시타 피그마 CPO 방한 기자간담회

피그마는 잡지를 통해 디자이너가 낯선 시각으로 세상을 관찰하고, 고민하며, 감정을 불어넣는 창작 주체임을 다정하게 일깨워준다. 정답을 빠르게 제시하는 AI의 속도감에 휩쓸리지 않고, 때로는 멈추어 서서 종이 페이지를 넘기며 고뇌하는 아날로그적인 시간이 디자인의 깊이를 결정짓는 핵심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AI 시대일수록 역설적으로 인간적인 온기와 고민이 담긴 디자인의 본질이 더욱 빛을 발할 것이며, ‘Start Anywhere’는 바로 그 본질을 잊지 말고 언제 어디서든 자신만의 창작을 계속해 나가라는 강력한 메시지이자 깊은 울림으로 남는다.
👉 원문 링크: AI시대, Figma는 왜 종이잡지를 디자인했을까?
유훈식 교수
hsyoo@smi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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