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을 도정하는 곳, 디자인 스튜디오 U.LAB 정미소(精美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음예예찬’으로부터 모티브를 얻었다는 디자인 스튜디오 U.LAB의 새로운 공간, 정미소(精美所)
대낮이라 하기엔 해가 기운, 저녁이라 하기엔 해가 빼꼼 보였던 오후 네 시. 남영동 뒷골목길을 따라 5분 남짓 걸었을까? 빨간 벽돌로 된 독특한 2층짜리 건물 한 채를 마주했다. 언뜻 봐도 외벽 곳곳에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는 이 곳이 디자인 스튜디오 U.LAB의 새로운 공간 ‘정미소(精美所)’.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음예(陰翳) 즉, 그늘인 듯 그늘 아니며 그림자인 듯 그림자 아닌 거무스름한 모습(다니자키 준이치로)으로부터 모티브를 얻었다는 이 공간에, 참 적절한 타이밍에 잘 맞춰 왔다는 뿌듯함이 들었다. 그렇게 정미소 문을 열고 들어가 김종유 U.LAB 소장과 대화를 시작했다.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본인 및 스튜디오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U.LAB 소장 김종유입니다. U.LAB은 제 이름의 ‘유’자를 따와 저만의 실험실이라는 의미로 2007년에 만들어진 디자인 스튜디오입니다. 공간 디자인(Space identity design)과 브랜드 디자인(Brand Identity design)을 주로 하고 있죠. 창업 초창기에는 카페, 베이커리, 패밀리 레스토랑 등 F&B(Food & Beverage) 공간을 위주로 했다면, 현재는 영역을 넓혀 전방위적 브랜드의 공간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F&B 공간 작업이 한창 많았던 당시엔 프랑스 요리 학교 끄로그동 블루에 등록해 수료까지 했는데요, 공부를 하고 나니 보다 깊이 있고 재미있게 작업을 하게 됐습니다. 그 예시 중 하나가 신라호텔 한식당인데, 피상적으로 눈에 보이는 디자인만이 아닌 그 안에 담겨있는 구조(Structure)를 이해함으로써 보다 진화된 작업을 할 수 있었죠.
공간을 이해함에 있어 말씀하신 ‘구조’가 무엇인지 조금 더 듣고 싶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구조’는 기둥과 같은 단순 구조물이 아니라 사람들이 움직이는 체계, 다시 말해 시스템을 의미 합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볼게요. 모 브랜드의 HMR 플래그십스토어 프로젝트 당시, 냉장고가 화두가 된 적이 있었어요. 냉장고는 가족의 커뮤니케이션 툴이기에 UI·UX를 적용하고 더 크게 만들어야 한다는 거였죠. 하지만 저는 반대했습니다. 1인가구가 크게 늘며 외식 및 배달 사업이 성장함에 따라 냉장고는 점점 작아질 것이라 생각했거든요.
제가 냈던 콘셉트는 ‘공유 냉장고’였습니다. 가니쉬로 사용할 오이를 구입하러 마트에 갔다고 상상해볼까요? 한 개만 따로 팔지 않아 고민하다 ‘사 두면 먹겠지.’라는 생각으로 3개가 담긴 오이 한 묶음을 샀습니다. 하나를 사용하고 나머지 두 개는 냉장고에 고이 넣어뒀죠. 하지만 하루, 이틀, 사흘 시간이 지나 결국엔 쓰레기통행. 이런 경험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거에요. 그런데 만약 세 개를 구입하더라도 나머지 두 개는 디지털로 코드화 시켜 부모님 또는 친구에게 전송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그러면 코드를 받은 사람들은 가까운 공유 냉장고에서 제품으로 교환할 수 있는 거죠. 식재료 낭비도 줄고 좋지 않을까요?
물론 방금 예시는 아주 단편적이고 쉬웠지만, 요는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 그리고 그들의 행동 방식을 바꾸는 것이야 말로 구조에 대한 고민이라는 겁니다. 단순히 표면적이고 피상적으로만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그 안에 담긴 시스템 자체를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켜 주는 것, 어찌 보면 이것이야 말로 공간을 다루는 사람들이 꼭 해야 할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제가 와있는 이 곳, 정미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전 사옥이 장충동에 있었는데, 2011년 처음 그곳으로 들어가던 당시엔 지금과 같은 철학보다는 나만의 공간에 대한 욕심이 조금 컸던 것 같아요. 계속 그 곳에서 일을 하다가 이전부터 그 건물을 마음에 들어 하시던 어느 클라이언트분께 매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러고 나니 한편으로 굉장히 허탈하더라고요. 문득 ‘이 공간에 만일 우리가 원하는 생각과 행위를 담았더라면, 매각하지 않았겠지?’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렇게 새로운 사옥을 준비하던 차에 이 건물을 마주하게 됐습니다.
이곳은 1931년도 일제 시대에 정미소로 지어진 건물입니다. 행정구역 상 남영동에 위치했는데요, 남영동이란 명칭은 서울 남쪽인 이곳에 군영이 있던 데서 유래합니다. 그래서 군부대에 납품하는 쌀들을 도정해 납품하던 장소로 추측됩니다. 저도 처음에는 적산가옥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서울시 역사 선생님들끼리 서울 시내 건물을 탐방하던 중 저희 건물을 보시고는 지도책을 펼쳐 오래전 이곳이 정미소였다는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쌀(米)을 도정하던 공간에서 아름다움(美)를 도정하는 공간으로 만들기에 이 공간이 갖는 시간성과 장소성이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건물에 크게 손을 대고 싶지 않았고, 가급적이면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살려 활용하려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든다면 그것은 이 공간과 이질적이지 않은, 조화될 수 있는 소재여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것이 바로 1층에 있는 삼베 벽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만들어지게 됐나요?
이런저런 소재를 찾다 보니 삼베가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삼베는 사람이 죽었을 때 몸을 감싸는 천이기도 하지만, 여름에는 우리 몸에 친숙하게 달라붙는 전통 소재이기도 하죠. 개인적으로는 어렸을 적 매해 여름마다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삼베 이불을 덮곤 했는데, 그 기억을 떠올리다 보니 여름 날 삼베 이불을 덮었을 때 그 사이로 들어오던 빛이 생각나더라고요. 그래서 이 공간에도 삼베로 만든 벽이 하나 있고, 그 삼베 벽 사이로 조명이 나오면 어떤 느낌일까 상상했습니다.
삼베라는아이디어를 떠올렸을 땐 아주 흥분됐어요. 10미터가 넘는 벽에 삼베를 치고, 두 가지 조명을 넣어 빛을 비추면 어떤 모습이 만들어질까 하고 말이죠. 삼베는 직접 사용하던 것을 사용해 있는 그대로의 물성을 보여줬는데, 비하인드 스토리를 말씀드리자면 사실 이 벽에 사용된 삼베는 모두 저희 어머니께서 손수 박음질로 완성해 주셨답니다.
오래된 건물인 만큼 이곳이 지닌 의미와 가치가 남다를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요즘 많은 사람이 ‘재생’이라는 키워드를 이야기하는데, 사실 그 재생의 의미를 잘살펴봐야 합니다. 무엇을 살리고 없앨 것인지, 무엇을 보강하고 남겨둘지가 굉장히 중요한데 그걸 필터링하지 않은 채 재생이라 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흉내 내고 싶어도 못 따라하는 것이 시간의 힘이에요. 오래된 공간인 양 인위적 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누가 봐도 티 나기 마련이죠. 그래서 100년 가까이 된 이 건물을 눈 앞에 처음 마주했을 때 굉장히 설레었답니다. 공사도 팀원들과 직접 했고요. 사실 U.LAB 설립 초부터 오래되고 심도 깊은 공간에 대한 애착과 동경이 있었어요. 직업 특성상 항상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결국 우리가 원하는 공간은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어 자연스레 어깨에 힘이 빠지고, 편히 쉴 수 있는 곳이었거든요.
그런가 하면 공간을 설계하시면서 팀원들과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저서 ‘음예예찬(陰翳礼讚)’을 함께 읽으셨다고 들었어요.
네 맞아요. ‘음예예찬(陰翳礼讚)’은 ‘그늘에 대하여’로 번역되기도 했죠. 1933년도에 지어진 이 책에서는 서양 문화가 유입됨에 따라 사라지고 있는 동양 문화에 대해 개탄하고 있어요. 또 서양은 태양의 빛을 숭배하는 문화였다면, 동양은 달빛이나 어두움에서부터 모든 것이 형성됐다고 이야기합니다. 팀원들과 이 책을 함께 본 이유는 ‘나쓰메 소세키’ 같은 일본의 대호들이 그늘처럼 어수룩한 공간에서 집필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는 부분에 주목했기 때문이에요. 저희 또한 창작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인데, 한층 톤 다운된 공간 즉,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에 대해 같이 이야기하고 싶었거든요. 음예예찬을 통해 우리의 공간에 대한 영감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 결과 삼베 벽에서 나오는 조명을 빛 삼아, 조용하고 침착한 분위기에서 아이디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또 하나의 음예 공간을 탄생시키게 됐죠.
삼베 벽으로 1층의 사무 공간이 분리된 점도 굉장히 독특해요.
제가 느끼는 ‘좋은 생각’은 화려한 미사여구로 풀어내는 것이 아닌, 딱 한마디로도 정의 내릴 수 있는 것이에요. 좋은 생각을 도출하기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는데, 그 과정에서 회의는 필수죠. 그런데 이 회의를 하기 위해서는 모든 팀원들이 혼자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일반적인 사무실에서 윗 분들이 아래 직원들에
게 “얘들아 말 좀 해봐.”라고 하시죠? 물론 저희도 겪었던 과정이고요. 그런데 말하라고 하기 전에, 그들에게 말로 꺼내 놓을 생각을 준비하기에 충분한 시간을 줬는가 고민해야 합니다. 제대로 생각할 겨를도 없는데 회의 테이블에 앉는 들 무슨 이야기가 나올 수 있겠어요.
어떻게 하면 직원들이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함께 공유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보니 공간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고, 결론적으로 음예 공간에 다다르게 됐죠. 그래서 삼베 벽 안쪽 공간을 완전한 음예 공간으로 설계했습니다. 어두운 조명 아래 침착한 분위기에서 혼자만의 상상과 고민을 충분히 하고, 후에 각자의 생각을 가지고 바깥 테이블로 나와 이야기를 하는데, 실제로 각자들의 생각이 훨씬 더 풍부해진 것 같아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앞으로 정미소는 어떤 공간으로 기억되기를 원하시나요?
처음 이곳이 정미소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쌀(米)이 아닌, 아름다움(美)을 도정하는 이 공간은 어떤 곳이어야 할까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곳은 ‘정제되고 풍부해진 삶으로 가는 방법에 대한 해법을 찾는 공간’이라는 답을 내리게 됐죠. 거창하고 화려하다 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남은 게 없을 만큼 정제하고 또 해 그야말로 정수(精髓)가 되었을 때, 그것이야 말로 궁극의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정제된 것들이 많아지면 앞으로 우리의 삶이 풍족해지지 않을까요? 그래서 이번 정미소 프로젝트가 아주 의미 있었던 것이고요. 이렇듯 정제를 하기 위해 그것이 공간이든, 구조이든, 혹은 소재이든 항상 끊임 없이 실험하는 곳으로서, 항상 변화를 만들어 내는 곳이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