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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인터뷰] 누구나 주인공이 되는 일러스트레이터 누림의 세계관

다른 시각으로 나만의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 갈까요?

아름다운 과거에 사로잡혀 나아가는 법을 잊으면 평생 그곳을 헤맬지 모른다는 의미를 담은 작품 <아름다운 감옥>

차분한 초록빛의 전통과 키치한 형광색의 교차점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작가가 있다. 일러스트레이터이자 그래픽 디자이너인 누림은 한국의 전통 요소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며 독특한 작품 세계를 구축해 왔다. 그의 작품 속에는 으스스하면서도 매력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으며, 다양한 생명체가 각자의 서사를 품고 등장한다.

누림 작가의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다. 기존 미디어에서 소외됐던 다양한 존재가 그의 캔버스 위에서는 당당한 주인공으로 거듭난다. 전통 한복의 특징을 분석하고 이해한 뒤 키치한 디자인을 입히는 등 그만의 방식으로 익숙한 것에 낯선 시선을 더해 새로운 서사를 창조해 낸다. 이러한 그의 창작 세계를 세 가지 주제로 살펴봤다.

전통과 현대의 경계에서 피어나는 독창성

누림 작가의 작품에서는 전통과 현대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그는 우리에게 익숙한 전통 요소들을 전혀 다른 분위기로 재해석해 새로운 시너지를 창출한다. 그의 작품이 단순히 전통적인 느낌에만 머무르지 않고 현대와의 조화를 이루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제맥주 브랜드 ‘카브루’와 누림 작가의 콜라보로 탄생한 작품.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엿볼 수 있다<카브루 콜라보 일러스트>

전통적인 요소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요?

우리 고유의 문화와 소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전통을 재해석하는 것에 재미를 느꼈기 때문이에요. 전통문화라고 하면 누구나 쉽게 연상되는 이미지와 무드가 있잖아요? 차분하고 고풍스러운 느낌처럼요. 거기에 완전히 다른 이미지와 무드를 덧씌우면 어떤 시너지가 날지 궁금해서 그저 손이 가는 대로 그려봤다가 전통 소재를 다루는 것에 매력을 느끼게 됐어요.

전통과 현대를 잇는 과정에서 가장 신경 쓰는 점은 뭔가요?

아무래도 전통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죠. 얼핏 보면 제 작품 속엔 키치한 디자인의 형광색 한복이 등장하니 전통 한복의 고증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는데요, 사실은 전통 한복의 특징을 스케치 단계부터 많이 찾아보고 분석합니다. 최종 완성본에서 한복의 원형이 거의 남지 않더라도 이런 과정은 필수적으로 들어가는데, 그 이유는 전통 요소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만 전통을 현대와 매끄럽게 연결할 지점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전통에 대한 이해 없이 개성만 넣으려 한다면 작품이 매력적으로 보이기보단 어색하거나 맥락 없어 보일 거예요.

전통 한복의 특징을 형광색 한복에 녹여낸 <저세상 주스>

작품에서 유독 초록색을 많이 볼 수 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색이에요! 그래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주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작품에 자연물이나 풍경이 자주 등장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초록색을 많이 쓰기도 하고요. 다만 요즘엔 컬러를 더 풍부하게 사용하기 위해서 소재에서 쉽게 연상되는 색은 일부러 배제하는 작업과 동시에 자주 쓰던 컬러를 깊이 있게 쓰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초록색은 특히 깊이감을 주고 싶은 컬러이자 훗날 가장 잘 쓴다고 인정받고 싶은 컬러예요. 그만큼 애정하는 색입니다.

이번 278호 표지 <여러사람의 여름>에서도 자연의 초록색이 눈에 띈다

작업 할 땐 주로 어떤 툴을 사용하시나요?

클립스튜디오를 사용해요. 특정 브러쉬를 활용하고 싶었거든요. 포토샵이나 클립스튜디오를 포함해 각 프로그램엔 그 프로그램에서만 사용되는 브러쉬나 소재가 있어요. 포토샵을 주요 툴로 쓰는 이유도 비슷한 맥락으로, 제가 가장 많이 쓰는 텍스처 브러쉬가 포토샵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텍스처를 다른 프로그램에서 찾아 써봐도 미세한 차이가 있기에 아직은 포토샵에 더 손이 가는 것 같습니다.

누림 작가가 클립스튜디오로 완성한 일러스트 작품 <자수>

으스스하면서도 매력적인 이야기의 세계

세 개의 눈을 가진 인물, 누군가 침입하고 있는 듯한 장면 등 으스스하면서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가 누림 작가의 작품에 독특한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이러한 분위기는 단순히 시각적 효과를 넘어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역할을 한다.

연잎에 떨어진 빗방울이 잎을 타고 내려가 보석으로 맺히는 늪지의 인어를 그려낸 <늪지 인어>

작품이 으스스해요. 이런 분위기의 작품을 만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일차적으로는 그런 으스스하고, 서늘하고, 기괴한 속성이 저의 취향이라 그런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그런 분위기의 작품을 즐겨 봤거든요. 다른 이유로는 이런 스타일이 독자의 상상력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훌륭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작품을 처음 딱 봤을 때 기괴하고 으스스하면서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색감과 구도, 연출에 신경을 씁니다. 예를 들어 <Missing Kids>에서 호러틱하고 불안한 느낌을 줄 수 있도록 어두운 초록색 바탕에 핏빛이 연상되는 붉은색을 같이 사용한 것처럼요.

색감을 통해 ‘사라진 아이들과 눈을 마주하지 말라며 경고’하는 <Missing Kids>

사람이 아닌 대상이 주인공으로 많이 등장해요. 이처럼 다른 생명체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있나요? 또 영감은 주로 어디서 얻는 편인가요?

제가 추구하는 세계관이 ‘누구나 주인공이 되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누구나 제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사람이 아닌 존재를 등장시켜요.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다양한 것을 찾아보는데 주로 영상매체를 통해 영감을 얻는 편입니다. 영상과 그림은 같은 소재라도 보여주는 방식이 다르다 보니 제겐 익숙한 소재도 영상에선 색다르게 보이죠. 그럼 자연스럽게 ‘저런 연출에서 다른 생명체를 배치하면 어떤 느낌일까?’ 식으로 영감이 전개되곤 합니다. 그것들을 작업에 접목할 때도 많고요.

가장 애정하는 본인의 작품을 하나 꼽는다면요?

두 번째 텀블벅 프로젝트였던 『양초집』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저만의 색깔이 드러나는 일러스트북을 만들고자 열심히 고민했던 만큼 구매자에게 사랑도 받았기에 애정이 가는 작품이에요. 어떻게 보면 일러스트에 제 기획을 접목한 첫 작업이라 더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어떤 타깃을 공략할지, 어떤 매력을 강조할지 금액은 어떻게 잡아야 구매 욕구를 불러일으킬지, 리워드는 어떻게 구성할지 등 나름대로 전략과 기획을 짰고 그게 좋은 결과로 이어져 지금까지도 제게 영감을 주는 작품입니다.

『양초집』은 독자가 직접 만드는 미스터리 단편 만화책으로, 책의 중간중간 비어 있는 공간에 스티커를 붙여 나만의 설정으로 이야기를 채울 수 있다

누구나 주인공이 되는 세계’를 향한 여정

누림 작가의 작품과 활동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철학은 ‘누구나 주인공이 되는 세계’다. 그의 인스타그램과 노트폴리오 소개란에도 적혀있는 이 문구는 단순한 슬로건이 아닌, 작가로서의 정체성과 깊이 연결된 가치관이다. 기존 미디어에서 소외됐던 다양한 존재에게 주인공이라는 지위를 부여하는 그의 노력은 작품 활동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나타난다.

<미래>는 제목과 역설적이게도 오히려 오지 않길 간절히 바라는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는 작품이다. 주목받지 않는 훼손되고 파괴되는 자연에 대해 담은 지구적인 메시지에서 누림 작가의 정체성을 느낄 수 있다

앞선 질문에서 ‘누구나 주인공이 되는 세계를 그린다’고 답해주셨어요. 이 말의 구체적인 의미가 궁금합니다.

영화나 만화를 보다가 문득 ‘이야기 주인공이 되기에 적합한 조건이 따로 있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특정 성별, 연령, 서사, 외모 등 ‘주인공을 만드는 도식’ 같은 것들이 보이더라고요. 물론 이전부터 그런 도식에서 벗어난 시도를 하는 이들은 많았고, 그들을 보며 저도 다양한 이를 조명하는 것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여성과 아동, 퀴어, 장애인을 포함하여 사회적 소수와 약자를 대변하는 이들을 등장시키는 시도를 하게 됐죠. 여기서 비롯된 문구가 ‘누구나 주인공이 되는 세계를 그린다’는 것입니다. 거창한 말이지만 앞으로 작품 활동을 하면서 딱 한 가지를 다짐해야 한다면 이 문구일 정도로 저의 중요한 정체성 중 하나예요.

본인의 작품 스타일이나 정체성, 추구하는 바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요?

‘나만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제 작품은 언제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요, 여기서 ‘나만의’라는 단어에는 저뿐만 아니라 독자도 포함됩니다. 독자마다 다른 시각으로 제 작품을 바라본다면 하나의 작품에서도 다양한 이야기가 파생되겠죠? 한 작품에서 자신만의 해석을 찾는 경험이야말로 제가 가장 전달하고 싶은 가치입니다. 이런 지향점을 정립한 데에 영향을 받은 작품 중 하나를 꼽자면 미셸 오슬로(Michel Ocelot)의 <프린스 앤 프린세스(Princes Et Princesses)>가 있어요. 여러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애니메이션 영화인데요, 각각의 에피소드가 짧은데도 무척 매력적인 데다 여운도 깊어 이야기 해석에 흥미를 가지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통영의 대발을 모티브로 한 배경지를 자유롭게 꾸미고 실을 꿰어 완성하는 ‘통영 커스텀 포스터 키트’를 통해 독자는 자신만의 작품을 구성할 수 있다

분야를 막론하고 다양한 활동을 하는데, 가장 애정이 가는 작업 분야는 무엇인가요?

이전엔 이 질문에 일러스트라고 대답했을 것 같아요. 제가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 분야니까요. 지금은 일러스트와 디자인 둘 다 해당됩니다. 전공이 시각 디자인임에도 예전엔 디자인에 관심이 적었고 어떻게 활용할지도 모르겠어서 일러스트를 많이 작업하곤 했는데요,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디자인에 대한 열망이 생긴 후로는 디자인과 일러스트를 함께 접목하는 것에 가장 많이 공들이고 있습니다. 디자인만 참여한 작업과, 일러스트만 참여한 작업 그리고 디자인과 일러스트를 믹스한 작업은 조금씩 매력이 다르거든요. 그중에서도 디자인과 일러스트를 믹스하는 것에 관심이 많은 건 제가 가진 역량을 최대한으로 끌어내야 해 매번 도전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입니다.

<꿈으로 뜬 모자>는 꿈을 기억하기 위해 꿈에서 만난 것들로 뜬 단 하나뿐인 모자로, 일러스트와 디자인을 믹스한 작품이다

올해 목표와 앞으로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은지 듣고 싶습니다.

올해는 개인 작업을 통해 제가 가진 역량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전엔 한계점이 보일 때 어떻게 돌파하면 좋을지 막막했다면, 올해는 그 방법을 좀 찾은 것 같아서요. 그 방법에 따라 더 깊이 있는 작업을 이어가고 싶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도전하는 작가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제 작품을 통해 작게나마 재미와 영감을 얻을 수 있길 바라며 앞으로도 계속 좋은 작품으로 만나 뵙고 싶습니다. 제 작품을 사랑해 주시고 응원해 주신 모든 분에게 감사하단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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