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걸 꾸준히 하는 힘은 강해요” 정규영 CD 인터뷰
아카이빙과 크리에이티브에 진심이 가지는 의의에 대하여


광고대행사에서 20여 년간 일해온 정규영 CD(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어느 날 운명적인 사건을 맞이했다. 우연히 유튜브에서 ‘푸른 산호초’ 공연 영상을 보고 일본 가수 ‘마츠다 세이코’에 푹 빠지게 된 것.
“가사를 이해하고 싶어”
“마츠다 세이코에 대해 일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좋겠어”
푸른 산호초를 계기로 정 CD는 곧장 일본어 회화 학원에 등록했다. 일본어 실력이 늘어가자 점차 일본 콘텐츠에 대한 관심도 확산됐는데, 그가 다다른 곳은 그의 본업인 광고 영역이었다. 어느 날 마주한 일본의 문구 회사, ‘파이롯트(Pilot)’의 “이름은 부모가 자식에게 보내는 첫 편지일지 모른다”는 카피에 마음이 움직인 게 결정적이었다.

이후 정 CD는 일본 광고의 카피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부터 일본의 카피 연감을 콜렉팅했고, 시간이 날 때마다 광고 영상을 찾았다. 아카이빙은 곧 공유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졌다. 스스로에게 영감을 불러 일으키는 근원을 나누고자 정 CD는 브런치스토리를 시작했고, 인스타그램에도 좋았던 카피를 정리해 올리기 시작했다.
아카이빙에 대한 정 CD의 열정은 자연스럽게 출판으로 이어졌고, 최근 첫 저서였던 에세이에 이은 두 번째 저서 <일본어 명카피 핸드북>이 세상에 나왔다.

정 CD의 아카이빙은 좋아하는 것에 대한 진심이 가지는 의미를 궁금하게 한다. 과연 그에게 좋아하는 것을 아카이빙 한다는 건 어떤 걸까? 그 답을 얻기 위해 지난 3월 초, 한편에 놓인 마츠다 세이코의 LP와 책장 빼곡한 카피 연감이 눈에 띄는 경복궁 인근의 사무실에서 정 CD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아카이빙이 가지는 생명력
안녕하세요. 20년이 넘은 광고인이라고 들었습니다.
안녕하세요. 광고대행사 렛잇플로우 이사이자 제작사 씨세븐플래닝즈 대표 겸 CD로 일하고 있는 정규영입니다. 광고대행사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오랫동안 광고업에 종사했죠. 현재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면서 한양사이버 대학교에서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겸하고 있어요.

<일본어 명카피 핸드북>을 재밌게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저자는 아카이빙에 진심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원래 좋아하면 깊게 파고드는 성향이 있는데, 광고 업계에서 일하다 보니 단순히 좋아하는 것에서 나아가 광고 아이디어에 도움이 될 소스를 모으는 일도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 나만의 래퍼런스 박스를 만드는 거죠. 필요한 소스가 있을 때 바로 바로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요.
아카이빙의 양이 커지면 달라지는 게 있나요?
생명력이 생겨요. 점차 양이 많아지면서 아카이빙된 자료 자체가 살아있는 생물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생명력이요?
사람의 관점이 덧붙여졌을 때의 이야기지만, 자료의 양이 어떤 임계치를 넘어가면 자료와 자료간에 상호작용이 일어나요. A와 B가 결합돼 C가 되는 식으로요. 그렇게 되면 단순히 자료의 묶음을 넘어선 가치가 만들어지고, 아카이빙의 쓰임새도 확장되게 되죠. 그 자체가 계속 발원되는 영감이 되는 거예요.
그런 영감이 실제 광고 일을 할 때 도움이 되나요?
늘 자극이 돼요. 특히 제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들을 생각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요. 예를 들어 화장품 광고를 하면 연관된 자료를 보고, 화장품에 대한 전형성이 있는 틀 안에 갇히기 쉽거든요. 그런데 이럴 때 전자, 자동차라던가 공공 쪽의 카피처럼 전혀 다른 자료를 읽거나 하면 단어나 문장, 문형에 자극을 받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도출할 수 있어요.
일본의 카피가 시적인 이유
카피라이팅에 진심인데, 일본 카피라이팅에 빠진 계기는 파이롯트의 카피였어요. 가장 좋아하는 카피도 같나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오래 지나지 않았을 때 그 카피를 읽게 됐어요. 그래서 더 와닿았던 것 같아요. 내 이름을 지을 때 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런 그리운 생각을 해보게 됐거든요.

추천하고 싶은 카피가 또 있는데, 일본의 대형 잡화점인 ‘로프트(Loft)’의 “봄은 시작되는 게 아니야, 시작하는 거야”라는 카피예요. 봄이 오고, 많은 게 시작될 것 같은 시기잖아요. 스스로 마음먹고 움직여야 정말 시작되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이 카피도 추천하고 싶어요.
시기나 경험이 카피에 대한 선호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지금 처한 상황이나 감정에 따라 테마처럼 와닿는 카피가 있어요. 파이롯트의 카피도 그렇고, 지금 로프트의 카피를 추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죠.

두 카피도 그렇고, 일본의 카피는 어딘가 시적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일본이 가진 문화적인 저변 때문이 아닐까 해요. 일본의 카피를 보며 “‘*하이쿠(俳句)’ 같다”고 평가하는 분들이 많거든요. 실제 일본은 지금도 하이쿠를 짓는 사람들이 많아요. 대회도 자주 있고, 수상작을 엮은 책의 출판도 활발하죠. 이처럼 시적인 문학을 향유하는 문화의 영향이 배어 있는 거라고 봐요.
*하이쿠: 각 행마다 5, 7, 5음을 가지고 총 17음으로 이뤄진 일본의 정형시. 일반적으로 계절을 나타내는 단어인 기고(季語)와 구의 매듭을 짓는 말인 기레지(切れ字)를 가진다.
그런 시적인 카피가 광고로써 효과를 발휘하니까 계속 등장하는 거겠죠?
정서적인 부분도 있겠지만, 문학적인 카피는 은유적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요. 직접적으로 무엇을 하라고 이야기하는 ‘Push’가 아니라, 소비자가 갖고 있는 삶의 영역 안에서 공감을 건드리며 관심을 유도하는 ‘Pull’ 형태에 가깝죠.
물론 일본에도 Push에 가깝고, 유치한 광고도 많아요. 하지만 사람들에게 사랑 받고 상을 받는 광고는 제품이나 서비스가 가지고 있는 메시지와 소비자가 가진 삶의 영역 사이에서 공감을 찾는, ‘말을 거는 광고’라는 공통점이 있어요.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하는 힘
말을 거는 광고라는 표현이 인상적이네요. 그럼 좋은 광고도 같은 맥락일까요?
카피는 글 쓰는 사람의 예술 작품은 아니잖아요? 클라이언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콘텐츠로 봐야 하죠. 광고에는 수많은 목적이 있어요. 그 목적을 달성하면 좋은 광고인 거죠.
말을 거는 광고는 좋은 광고 중 하나의 분류인 거고요. 좋은 광고는 유형의 문제가 아니라 목적에 대한 충실함의 잣대로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카피를 문학적인 잣대로 평가하는 건 불가능할까요?
그렇지 않아요. 카피를 평가하는 잣대 중에 하나인 거죠. 예를 들어볼게요. ‘함께 쓴 우산, 젖어있는 쪽이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는 교토 은행의 카피가 있어요. 이 카피가 힘을 발휘한 건 오래 함께하는 은행이 되겠다는 교토 은행의 메시지에 효과적으로 부합했기 때문이에요. 교토 은행은 이렇게 문학적인 광고 외에도 유쾌한 CM송으로 광고를 만들 수도 있어요. 둘 다 목표로 한 메시지가 효과적으로 전달된다면 좋은 광고인 거죠. 그저 목적과 수단을 명확하게 바라보면 돼요.
광고는 상업성과 크리에이티브가 얽혀 있는 필드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 사이에서의 줄다리기는 없나요? 간혹 더 예술적인 욕심이 난다던가…
일을 할 때는 순간에 빠져서 크리에이티브에 매몰되는 순간이 있어요. 하지만 이 일은 제 크리에이티를 보여주는 게 목표가 아니라, 클라이언트의 목적을 달성하는 게 최고의 목표라는 걸 명심하고 중심을 잡으려고 하죠. 그런 본연의 목표에 충실한 가운데 예술적인 완성도를 높이는 건 분명 의미가 있고요.
광고 업계의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그것도 비슷할까요?
비단 후배 광고인뿐 아니라, 광고인을 꿈꾸는 사람, 또 크리에이티브한 콘텐츠를 만드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인데요. 저는 “좋아하는 걸 꾸준히 하는 힘은 정말 강하다”는 걸 전하고 싶어요.
이 일이 상업적으로 잘 될 것 같다는 접근보다는, 순수하게 크리에이티브한 아이디어를 내는 게 좋아, 그런 접근이었으면 싶어요.
어쩌면 순수한 동기에 대한 강조 같기도 하네요.
광고 산업의 형태는 많이 변화했을지 몰라도 새로운 걸 찾아내고, 크리에이티브를 표현하고 싶어하는 사람의 마음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어요. 본연의 가치에 충실하다면 크리에이티브는 늘 의미를 가지는 법이니까요.
4~5년 전만 해도 일본 문화에 대한 관심과 우호도가 지금 같지 않았어요. 그때 제가 사람들의 관심을 의식했으면 일본 카피에 대한 책을 내서는 안됐겠죠. 단지 저는 그 시점에 제가 찾은 좋은 것들을 순수하게 전한 거예요. 그 양이 계속 늘어나니 관심을 받고, 의미를 만들어 갈 수 있던 거고요.

광고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전망이나 그런 게 아니라, 나는 아이디어를 통해 대중과 소통하는 게 너무 즐겁다. 그런 순수한 즐거움만 있다면 고민할 것 없이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니, 열심히 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자세로 쌓아나가는 것들은 분명 의미가 있을 거예요.
뉴스콘텐츠는 저작권법 제7조 규정된 단서조항을 제외한 저작물로서 저작권법의 보호대상입니다. 본 기사를 개인블로그 및 홈페이지, 카페 등에 게재(링크)를 원하시는 분은 반드시 기사의 출처(로고)를 붙여주시기 바랍니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출처 없이 본 기사를 재편집해 올린 해당 미디어에 대해서는 합법적인 절차(지적재산권법)에 따라 그 책임을 묻게 되며, 이에 따른 불이익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 에디터이민호 (treewords@ditoday.com)
- 섬네일손 찬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