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터의 역할은 어디까지일까?
굳이 골 넣는 수비수가 될 필요는 없다
스페인의 라모스, 브라질의 루시우, 대한민국의 이정수까지. 이들의 이름을 보면 공통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그렇다. 바로 ‘골 넣는 수비수’라는 별명을 가진 축구 선수들이다. 아무래도 수비수는 다른 포지션의 선수들과 달리 골문을 지키기 때문에 골을 넣을 수 있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다. 무엇보다 그들의 존재 가치는 상대 공격을 후방에서 막아내는 데 있다. 골을 넣는 게 아니라 골을 막는 것. 그렇기에 골 넣는 수비수라는 별명은 그 선수의 다재다능함에 관한 수식어일 것이다.
한 팀에 다재다능한 선수가 있다면 감독은 전술 운용에도 수월할뿐더러 동료들이 함께 뛰는 데 능률이 올라갈 것이다. 그래서 많은 장점을 지녔거나, 다양한 포지션에서 경기를 뛸 수 있는 선수에 대한 기대가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수비수는 상대의 공격을 막는 일에 더 집중하는 것이 그들의 존재 가치다.
당신은 어떤 수비수인가?
조직이 제대로 굴러가기 위해서는 협력하는 부서 또는 부서 내 R&R(Role&Responsibility)을 디테일하고 명확하게 정의 및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몇 번을 더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다. R&R에 대한 개념이 낯선 이들은 스포츠에 빗대 생각하면 쉽다.
축구 경기를 떠올려 보자. 흔히 센터백이라 불리는 최종 수비수가 팀의 에이스로서 다른 선수들보다 발재간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혼자 드리블해서 최전방까지 올라온다면 팀은 찬스를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칫 작은 실수 하나로 그 팀은 위기에 빠질 확률이 더 높다. 역습을 당해 실점할 확률이 높다. 게다가 이러한 일이 반복될 경우 팀원들의 사기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레프트백, 라이트백이라고 불리는 측면 수비수는 어떨까. 그들은 상대의 측면 공격을 막는 역할이지만, 최근 축구의 흐름에서는 측면 수비수에게 수비 못지않게 뛰어난 활동량과 스피드를 바탕으로 공격에 가담하길 원한다. 이를 ‘오버래핑(Overlapping)’이라고 하는데, 공격 숫자를 늘려줌으로써 공격 루트를 다양화하는 데 기여한다. 그러나 측면 수비수가 가장 우선해야 하는 역할은 이름에도 드러나듯 ‘수비’다. 수비수를 평가하는 데 가장 안타까운 표현이 바로 ‘공격은 잘 하는데, 수비를 못 한다’는 것 아닐까.
명확한 R&R 설정부터
정리하자면 안정적으로 경기를 운영하며 위기 상황에서 유연한 대처를 위해서는 자신의 역할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동료의 움직임을 수시로 파악하며 유연한 태도로 긴밀히 움직여야 한다. 유기적인 팀워크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회사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파악하고 이를 정리하는 과정에 있어 협력부서와 합의를 이뤄내야 한다. 치사하게 ‘땅따먹기’식의 R&R 설정이 아닌 유기적인 역할 분담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레이존(Gray zone)이 발생하기 쉽다. 사람들이 이 부분을 자주 혼동한다. 자신이 멀티플레이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는 R&R 설정이 명확하지 않아 업무를 비효율적으로, 또는 비효과적으로 하는 경우가 있다. 결국 동료와의 유기적인 역할 분담과 자신의 역할을 명확히 정리하는 것은 실무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웃 부서와 협업하면서 얼굴을 붉힌 경험이 있을 것이다. 지금 이야기하는 에피소드는 나의 베이비 시절 부끄러운 경험이며, 역할 분담의 중요성을 고민하게 된 계기기도 하다.
유저데이터 분석회의였던 것 같다. 유저 유입량과 신규 유저의 매출 등 서비스 내부 지표들을 토대로 현재 진행하고 있는 마케팅 활동들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파악하자는 의도로 갑자기 열렸다. 정기 회의가 아니었기에 별다른 생각 없이 참석했다. 이게 문제였다. 회의는 생각 없이 가는 게 절대 아니다.
회의를 시작하자마자 ‘퍼널’(Funnel)이란 단어가 반고리관을 거쳐 유스타키오관을 때릴 때 순간 얼굴이 붉어지며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뻐널? 아, 이거 수업시간에 들어 봤는데?’
아무리 전공을 했다고 해도 전문용어를 책이 아닌 실무로 대할 때면 아는 것도 버벅댈 때가 있다. 게다가 회의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 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면 불안감은 더욱 증폭된다. 노트북에 대놓고 검색을 해 보자니 왠지 옆 사람이 볼 것 같고, 스마트폰을 꺼내자니 왠지 딴짓하는 것 같고. 그러다 회의에 점점 몰입하면서 노드가 끊긴 기억들이 하나씩 짜 맞춰지고 달아올랐던 얼굴은 제 온도를 찾는다.
나처럼 헷갈리는 이들을 위해 잠시 마케팅 퍼널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하고 넘어가겠다. 마케팅 퍼널은 주로 잠재적 고객을 내 브랜드의 고객으로 끌어들이고 이들에게 충성도를 갖게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이야기할 때 주로 쓰이는 용어로, 고객 행동을 기업 관점에서 정리한 고객 분석 방법론이다.
조금 풀어서 설명하면 마케팅 활동을 통해 유입된 고객이 내 브랜드를 인지한 뒤 친숙해지고, 구매를 넘어 충성도를 갖게 되는 일련의 과정들을 수치로 분석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 과정들 속에서 단계별로 데이터(고객의 행동)를 살펴보면서 기업 활동 중 취약한 부분이 어디인지 파악할 수 있다.
조금 더 쉽게 얘기하면 고객과 내(브랜드)가 만나게 된 순간부터 그들이 나(브랜드)를 떠나는 과정 동안의 이야기를 나(브랜드)의 관점에서 숫자로 정리한 관찰일지 같은 것이다. 이때 만남(유입)부터 이별(이탈)까지의 과정 동안 각 단계를 거치면서 고객 수는 점차 줄기 때문에 마치 이 형태가 깔때기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퍼널 덕분에 외출했던 멘탈이 제자리를 찾는가 싶었는데 이내 다시 얼굴은 달아올랐다. 프로덕트팀에서 마케팅팀에게 ‘의견을 가장한 불만’을 표출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우리 팀에서 새로운 광고를 론칭했는데 반응이 좋아 신규 고객이 증가했다. 그런데 문제는 퍼널을 살펴보니 신규 유저 가입은 증가했지만 그 유저들이 구매로 이어지는 비율은 이전보다 못하단 의견이었다. 이전보다 고객 이탈 비율이 높아졌다는 데이터와 함께 이번 캠페인을 지속할지 논의해 보자는 것이다. 고객 이탈이 우리 팀의 탓이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보통 마케팅 예산을 확대할 경우 기존보다 이탈률이 높아질 때가 있다. 쉽게 말해 10명의 고객을 확보했을 때보다 10만 명을 확보했을 때 이탈 비율은 일정하지 않을 때가 많다. 물론 캠페인이 이유가 될 때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데이터와 비교하며 더욱 면밀히 분석해야 한다.)
그 당시는 준비 없이 한 방 맞은 것도 있지만, 솔직히 경험과 실력이 부족했기에 나는 그저 어버버 거리다 다른 캠페인을 기획해 보겠다는 이야기만 하고 그 자리를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여전히 부끄러운 기억 중 하나로 남아 있다.
“막상 회원가입해서 들어왔는데 살 게 없어서 나가는 경우는 아닌지 체크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요?”
이 한 마디 붙이지 못한 게 내내 마음에 걸려 이불킥을 날렸다.
커머스의 경우에는 고객의 유입과 이탈 과정에는 마케팅팀만 관여하는 게 아니다. 서비스 안에서 고객이 사고 싶은 물건을 충분하게 유지하는 일, 계속 들어오고 싶게 만드는 일, 제품의 정보를 꼼꼼히 보고 구매하는 일련의 경험을 쉽고 편하게 서비스를 기획하고 디자인하는 일 등 개발팀과 프로덕트팀 모두가 관여해야 하는 일이다. 내가 치졸해 보이는 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억울한 건 억울한 것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명확하지 않은 R&R로 인해 정확한 진단을 내리지 못하고 애먼 광고 예산만 조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뒤끝 작렬!
그럼 마케터는 뭘 해야 하나?
위 그림과 같이 퍼널 단계를 봤을 때 마케팅팀은 고객을 유입시키는 역할이 주가 된다. 일단 사람들에게 브랜드나 서비스를 많이 알릴 수 있도록 그들과 만나는 접점을 최대한 확보해 이를 반복 노출시켜 고객이 될 수 있도록 집중해야 한다. 인식(Awareness)과 획득(Acquisition), 다른 말로 그들의 눈앞에 알짱거리면서 궁금하게 만들고 결국 와보게끔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마케터가 우선적으로 집중해야 하는 역할이다.
그에 반해 이렇게 유입된 고객들을 유지(Retention), 다른 말로 고객을 오고 또 오고, 계속 오게 하는 일을 독려하고 활성화하는 것은 마케팅팀보다는 프로덕트팀(회사마다 이름이 다르다)에서 그 고민을 시작해 타부서와 협업을 해 나가는 게 효율적이다. 마케팅팀이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치졸하지만 일을 미루진 않는다!)
우선 순위에 관한 이야기다. 다시 말해 우리 서비스를 경험한 고객에게 재구매를 유도하거나, 꾸준히 재방문하게 만드는 일에 대한 기획은 프로덕트팀에서 출발을 해야 한다. 마케터는 수비수면서 드리블로 최전방까지 올라가는 아슬아슬한 선수가 되기보다 상대방 공격수가 슛을 하지 못하게 그의 움직임을 꽁꽁 묶는 역할에 집중하는 게 중요하다. 코너킥 같은 세트피스 상황에 수비수들이 함께 올라가는 것은 예외지만.
R&R이란 말로 벽을 만드는 것은 주의
이 이야기를 할 때 항상 조심스러운 게 바로 사일로 이펙트(Silo Effect, 부서 간 이기주의)와 혼동하지 않는 것이다. 사일로 이펙트는 다른 부서와 담을 쌓고 자기들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현상으로 굴뚝 모양 창고인 사일로에 빗대어 조직 장벽, 부서 이기주의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물론 마케팅팀에서 어떤 고객을 유치하느냐에 따라 고객 유지는 달라지기 때문에, 마케팅팀이 퍼널 마지막 단계까지 책임이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니다. 특히 커머스의 마케터라면 고객 생애 가치(Life time value)를 따져 양질의 고객을 유입시켜야 하고 체리피커(Cherry picker, 상품이나 서비스 이용은 하지 않으면서 혜택만 챙기는 고객)의 유입을 최소화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만약 마케팅팀이 근시안적인 자신들의 성과를 위해 체리피커만 잔뜩 유입을 시켰다면 이는 앞서 말한 오너십(Ownership)이 없는 경우다.
계속 강조하지만 책임을 회피하는 것과 처음부터 자신들의 역할을 합의하에 규정하는 것은 다르다. 그리고 애초에 명확한 R&R 설정이 있었다면 서로 책임을 떠미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골은 넣으면 좋다
수비수가 골을 넣으면 좋다. 코너킥과 같은 세트피스 상황에서 수비수의 공격 가담은 동료들에게 힘이 된다. 특히 신체적으로 유리한 경우가 많은 수비수는 득점 성공 확률도 높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그러하면 좋은’ 것이지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성과가 아니라 팀과 조직의 성과라는 큰 목적 중심으로 자신들의 역할에 먼저 집중하는 것에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 슛을 연습하기보다는 태클 연습을 더 했으면 한다.
From. 어설픈 멀티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