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폰트 시대? 스토리텔링 더 중요해질 것” 모노타입 디자이너가 말하는 폰트의 미래
필 가넘 모노타입 수석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인터뷰
‘애리얼’ ‘헬베티카 나우’ ‘아브니르’… 이 폰트들은 특별히 디자이너가 아니더라도 문서 작성 프로그램을 사용해 본 사용자라면 한 번쯤 봤을 법한 유명 폰트다. 또 다른 공통점은 모두 모노타입이 개발·보유하고 있는 폰트라는 사실이다.
필 가넘(Phil Garnham)은 바로 이 모노타입에서 수석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 중인 폰트 디자이너다. 특히 그는 기업의 특성을 잘 살리면서도 통일성 있는 폰트를 디자인해 글로벌 기업들에 예술적 가치와 실용성을 모두 갖춘 폰트를 제공하는 걸로 유명하다.
실제 그는 글자의 선과 곡선, 전체적인 균형을 섬세하게 다루는 특유의 디자인 감각을 인정받아 D&AD 프로페셔널 어워드, 레드닷 어워드, ISTD 우수상, 유러피안 디자인 어워드 등 유명 디자인 어워드에서 다수의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최근 필 가넘 디렉터는 폰트가 사람의 감정과 기업 이미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과학적으로 연구하며, 트렌드 리포트를 통해 새로운 디자인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오는 12월 5일엔 모노타입 세미나에 연사로 참여해 세계화된 시각 문화의 패턴과 변화, 문자의 모습과 느낌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타이포그래피 트렌드를 짚어볼 예정이다. 그리고 이번에 운 좋게도 세미나에 앞서 그를 미리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과연 세계 최대 폰트 기업 모노타입에서 폰트와 사람을 연구하는 그는 폰트 디자인과 업계의 미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세미나에 앞서서 그가 생각하는 폰트 디자인의 핵심과 미래에 대해 물었다.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 한계를 넘기 위해 도전하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는 법이죠. 어떻게 폰트 디자이너라는 꿈을 가지게 됐나요?
어릴 땐 디자인이라는 주제가 멀게 느껴졌어요. 하지만 현대 미술과 추상 회화에는 흥미가 있었고, 형태와 구조를 탐구했죠. 그래서 그래픽 디자인도 일종의 순수 미술처럼 접근했습니다. 항상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고, 기존의 한계를 넘어서 가장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찾아내려고 했습니다.
이후 대학생 시절 2개의 폰트를 디자인하기도 했지만, 졸업 후엔 특별한 계획이 없어서 길을 찾는 데에 시간이 걸렸어요. 몇 년간 더 페이스 매거진, SEA 디자인, 루이스 모벌리 같은 다양한 회사에서 프리랜서로 일했죠. 그러던 중 폰트 스미스의 창립자 제이슨 스미스를 만나게 됐습니다.
폰트스미스는 한국에서도 유명한 스튜디오로 알고 있는데요.
네, 하지만 당시 제이슨은 영국 TV 채널 E4를 위해 커스텀 폰트를 디자인한 후 ‘폰트스미스’라는 폰트 디자인 회사를 막 시작한 참이었어요. E4 폰트는 영국 TV 채널 최초의 커스텀 폰트였고, 큰 성공을 거뒀죠. 제이슨과 저는 서로 잘 맞았고, 저에게 폰트 디자인 견습생 자리를 제안했어요.
저는 주로 현장에서 배우기 시작했는데, 매일매일 새로운 로고와 폰트 아이디어를 다뤄야 했어요. 너무 바빠서 정신없었지만, 그 점이 오히려 좋았어요. 그렇게 폰트스미스를 함께 키워서 14명 이상의 팀원을 가진 회사로 성장시켰고, 전 공동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됐습니다. 그리고 18년 후, 모노타입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고, 그 이후는 역사로 남았죠.
폰트 디자이너로서 나아가는 과정에서 큰 영감을 주거나, 도움이 됐던 디자이너들이 있을까요?
모더니스트 타이포그래피의 순수함이 특히 매력적이었어요. 에밀 루더, 볼프강 바인가르트, 빔 크라우웰 같은 디자이너들이 제 우상이죠. 그들은 형태와 구조를 새롭게 해석하고, 단순한 디자인 속에서도 비대칭성과 에너지를 발견했거든요.
그동안 여러 폰트를 디자인해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각별히 여기시는 폰트가 있으실까요?
‘FS Emeric’은 저에게 정말 특별한 폰트예요. 이 폰트를 완성하는 데에 몇 년이 걸렸고, 작업하는 동안 여러 번 디자인을 폐기하고 다시 시작해야 했어요. 솔직히, 당시엔 제가 너무 욕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전 헬베티카의 복사본 같은 폰트들을 대체할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어 세상에 기여하고 싶었어요. 정말 독창적인 폰트를 만들고 싶었던 거죠.
결국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긴 했지만, 제가 원했던 만큼 큰 반응을 얻지는 못했죠. 폰트를 출시하면서 디자인 스튜디오 친구들에게 포스터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어요. Studio Build, Dixon Baxi, NB Studio, Pentagram 같은 곳에서 도와줬죠.
하지만 세상이 이 폰트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 돼 있었던 것 같아요. 한 번은 폰트 디자이너 제러미 탱커드가 제게 이런 말을 했어요. “말을 물가로 데려갈 수는 있어도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 그 말이 참 와닿았어요. 그래도 저는 여전히 이 폰트를 애정하고 있고, 사용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FS Aldrin’은 FS Emeric에서 파생된 폰트예요. FS Emeric의 형태를 디지털 환경과 평면 디자인에 더 적합하게 수정했어요. 이 폰트는 우주적인 느낌이 있어서, 실제 우주 비행사인 버즈 올드린에게 이메일을 보내 폰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봤죠.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그가 답장을 보내줬어요! 그래서 폰트 이름을 FS Aldrin이라고 지었어요.
이 폰트로 UX 아이콘 폰트도 만들었는데, 그 안에 우주선 같은 이스터에그를 숨겨놓았어요. 버즈 올드린이 이 폰트를 자신의 트위터에 소개하면서 수백만 명의 팔로워에게 알렸을 때 정말 기뻤어요. 아마도 제 경력에서 이런 대단한 순간은 다시 오기 어려울 것 같아요!
기업 폰트에서 기능성보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
특히 기업 맞춤형 폰트로 유명하십니다. 기업 폰트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요? 역시 기능성일까요?
기능성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니에요. 폰트가 잘 만들어지고, 적절하며, 균형 잡힌 디자인이라면 기능성은 자연히 따라오는 부분이죠. 진짜로 중요한 것은 ‘스토리텔링’이에요. 단순히 기업을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의 이야기를 폰트에 담아내는 것이죠. 폰트 디자인을 통해 언어, 브랜드의 가치, 그리고 브랜드 아이덴티티가 서로를 연결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뻔한 디자인에서 벗어나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는 것도 중요해요. 때로는 기존의 틀을 깨면서 브랜드의 독창성을 폰트 안에 담아내야 하죠. 결국, 폰트를 통해 브랜드의 개성을 드러내고,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기업 폰트 디자인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폰트가 사람의 감정과 기업 이미지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 중이시라고 하셨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있을까요?
최근 코펜하겐에 있는 ‘뉴런스’라는 파트너사와 함께 흥미로운 연구를 진행했어요. 전 세계적으로 휴머니스트 산세리프, 지오메트릭 산세리프, 그리고 트랜지셔널 세리프. 이 세 가지 폰트 스타일을 조사했습니다. 연구의 목표는 각 폰트 스타일이 지역별로 어떻게 다른 감정적인 의미를 전달하는지, 사람이 폰트를 어떻게 선택하고 받아들이는지 이해하는 것이었죠.
연구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발견은 유럽과 아시아 지역이 서로 같은 폰트 스타일을 완전히 다르게 인식한다는 점이었어요. 예를 들자면, 유럽에선 현대적으로 보이는 폰트가 일본에선 전통적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런 차이는 글로벌 브랜드가 전 세계적으로 통합된 폰트 시스템을 구축할 때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될 수 있어요.
전 이 연구를 통해 “글로벌 폰트 시스템은 외형적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춰야 할까, 아니면 각 지역에서 느끼는 감정적 의미에 초점을 맞춰야 할까?“라는 중요한 질문을 던지게 됐어요. 아직 명확한 답은 없지만, 이 주제를 더 깊이 탐구하는 건 매우 흥미로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AI는 새로운 도전이자 기회
모노타입에서 트렌드 리포트를 담당하고 계신데, 최근 몇 년 동안 글로벌 타이포그래피 트렌드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무엇이었나요?
지난 몇 년간 정말 흥미로운 변화들이 있었어요. 예를 들어, 과거엔 ‘소프트 세리프’처럼 부드럽고 클래식한 스타일이 유행했다가, 이후에는 ‘아르누보’처럼 예술적이고 장식적인 요소가 주목받았죠. 최근 들어서는 디지털 기술과 관련된 그래픽적이고 모듈화된 스타일이 대세로 떠오르고 있어요. 한편 모노타입에선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새로운 폰트를 실험하는 프로젝트도 진행 중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입니다. 폰트가 지금의 모습으로 변화하는 데는 이유가 있어요.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기술적 변화가 디자인에 어떤 영향을 주고, 이런 변화가 어떻게 폰트의 형태와 스타일을 바꾸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하죠.
내년에는 리포트를 단순히 현재의 트렌드를 정리하는 것을 넘어서, 미래를 예측하는 보고서로 완전히 새롭게 구성할 계획이에요. 트렌드가 왜 생겨나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지 깊이 탐구하는 작업이 될 거라 정말 기대가 큽니다.
저 역시 기대되는군요. 혹시 미래 폰트 디자인 트렌드에 대해 특별히 맛보기로 알려주실 수 있나요?
개인적으로 AI가 폰트 디자인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기회라고 생각해요. 저는 이 변화를 정말 환영합니다. 지난 10년 동안 폰트 산업은 크게 성장했고, 이 분야에서 일하는 것은 정말 재미있고 흥미로웠어요. 앞으로 AI는 디자이너에게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폰트를 만들고, 전혀 새로운 영역에서 도전하도록 요구할 거예요.
하지만 AI의 도입을 두려워하거나 경계하는 디자이너들도 있지 않나요?
물론 단순히 익숙한 작업만 하거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지 못하는 디자이너들은 분명 어려움을 겪게 될 겁니다. 이제 디자이너는 단순히 폰트를 만드는 것 이상으로, 브랜드 이야기를 담아내고, 독창적으로 목표를 달성하는 능력을 보여줘야 해요. 이런 변화는 디자이너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열 계기가 될 거라고 믿습니다.
결국 디자이너가 그동안 숨겨져 있던 창의성과 진정한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시간이 오는 것이죠. 그리고 이로 인해 브랜드들도 더 대담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틀을 벗어나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결론적으로, AI는 디자이너들에게 도전이자 기회를 동시에 제공할 것이고, 이를 통해 폰트 디자인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변화가 좋은 쪽으로만 이뤄지지 않는데요. 최근 업계 트렌드 중에 실망스러운 부분도 있을까요?
폰트는 브랜드의 성격, 가치, 그리고 메시지를 은근히 드러내며 큰 영향을 미치죠. 그런데 요즘은 많은 폰트 디자이너가 기존 폰트와 비슷한 디자인을 반복적으로 만들고 있어요. 주로 라이선스 문제를 피하거나, 계약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죠. 이런 식으로 똑같은 디자인을 계속 반복하는 것을 보면 정말 아쉽습니다. 폰트 디자인이 창의적인 작업이 아니라 그냥 틀에 박힌 작업처럼 느껴질 때가 많아요.
폰트를 만드는 이유는 단순히 이름만 바꿔서 다른 폰트를 흉내 내는 게 아니에요. 브랜드만의 개성과 독창성을 표현하기 위해 폰트를 제작하는 거죠. 커스텀 폰트는 단순히 글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브랜드만의 이야기와 이미지를 담아내는 도구가 돼야 합니다. 결국 중요한 건, “이 폰트가 정말 새로운 아이디어를 담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업계에 뛰어들고자 하는 예비 폰트 디자이너들에겐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요?
폰트 디자인은 폰트를 많이 그려보는 것이 중요하지만 책을 많이 읽는 것도 중요합니다.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세요. 하지만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이 하는 일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있어야 꾸준히 성장할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