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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팅

엉덩이의 힘

뛰어난 마케터가 되기에 당신은 이미 늦었다. 그러나…

경고: 이번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제한적인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뇌피셜이기에, 과로로 혹사당하고 있는 직장인이라면 바로 ‘뒤로가기’를 클릭하시길 바랍니다.

업계에는 훌륭한, 뛰어난, 감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갖춘 마케터가 많다. 그리고 예산과 권한이 적다는 핑계로 성과를 낼 수 없다고 하는 마케터도 많다. 과연 그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 씁쓸한 현실, 현실적 한계

우리는 일반적으로 광고, 마케팅, 브랜딩과 같은 커뮤니케이션 영역에서 일을 하려면 풍부한 상상력, 남다른 사고방식, 뛰어난 미적 감각, 탁월한 순발력과 재치 등과 같은 재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맞다. 그래야 한다. 이런 여러 재능을 가진 사람이 일을 잘.한.다. 만약 이런 것들이 없다면 경력을 이어가기 쉽지 않을 터. 그러나 다행인 것은 이런 능력들은 무조건 타고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내 오랜 주장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운동신경 같은 신체적 유산보다 비교적 DNA의 영향을 덜 받는다는 뜻이다.

이 분야에서 일하면서 천재라고 생각되는 이를 종종 마주할 때가 있다. 열등감이 확 오른다. 부럽다. 그래서 그들을 끈질기게 관찰했고,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부모를 잘 만난 것이다. 위험할 수 있는 발언이다. 그러나 물릴 생각이 없다.

대신 여기서 말하는 ‘부모를 잘 만났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우수한 DNA의 대물림이나, 경제적 풍요만을 칭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런 것들도 포함할 수 있겠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란 이야기다. 일잘러들이 뛰어난 마케터가 되기까지는 그들이 인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어릴 때부터 잘 ‘훈련’됐을 확률이 높다는 뜻이다.

일잘러들과 만나 이야길 나눠보면 부모의 성향이나 교육 철학 또는 가정 형편 등 자라면서 접하게 되는 다양한 자극에 따라 영향을 받은 듯 하다. 다시 말해 ‘어떻게 살아왔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만약 당신이 이러한 크리에이티브 능력이 부족하다면 지금부터라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건설적이고 낭만적인 이야기가 되겠다. (그러나 그 길은 분명 가시밭길일 것이다.)

희망이 보이는가? 그렇지만 이 역시도 솔직히 쉽지 않다. 여기에는 치명적인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 같은 범인들에게는 돈과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 우리에게 자원은 유한하다. (부모 잘 만나) 이미 훈련된 사람과 이제 연습을 시작하는 사람 사이에는 격차가 존재하는데 이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결국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

이 격차를 줄이기 위한 방법론으로 내가 추천하는 것이 바로 ‘엉덩이의 힘’이다. 훈련된 사람보다 더 많은 연습량을 소화해야 격차를 줄일 수 있다는 말이다. 뻔한 이야기지만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당신이 투자한 시간은 당신을 배신하지 않는다. 타인과 상대 평가할 필요는 없다. 갖고 있는 능력과 근육이 다르기에 비교 자체가 무의미하다. 자신만 바라보라. 시간을 적게 투여한 자신과 그렇지 않은 자신을 비교해 보라. 그러면 명확해질 것이다.

# 엉덩이의 힘, 그 시작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데 있어 ‘제가 알고 보니 이 분야에서 타고난 재능이 있었습니다?’ 뭐 이런 하이틴 드라마스러운 전개를 기대했다면 미안하다. 여전히 나는 이 방면으로 ‘타고나지 않음’이 아쉽고 속상하다. 다만 농업적 근면성을 바탕으로 차곡차곡 만들어진 나의 필살기, 바로 엉덩이의 힘의 위력을 느끼게 되면서 작은 희망을 발견했고, 여전히 이 업계에서 밥벌이를 하며 그럭저럭 버티고 있다.

내가 이런 필살기를 가질 수 있게 된 데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인물이 있다. 바로 현재 네이버에서 커뮤니케이션그룹 총괄을 맡고 있는 채선주 CCO 되겠다. 내게는 스승이자 은인이다. 

그가 평소에 자주 하던 말이 바로 ‘농업적 근면성’이었다. 내가 만든 자료를 볼 때마다 그는 반은 화난 심정으로, 나머지 반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종종 말하곤 했다.

“영웅아, ‘야마’만 잘 잡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야. 더 이상 파지 않아도 되겠다 싶을 때! 그 때 한 번 더 파야 해. 무슨 말인지 알지?”
“넵!”
“……그리고 그걸 한 10번 정도 더 해봐. 그럼 돼.”
“네?”

이런 말과 함께 늘 “다시!”가 마침표 대신 따라왔다. 그렇게 늘 언제나 내 ‘숙제’는 쉽게 통과되지 못 했다. 여기서 숙제란, 홍보실의 일상적인 업무 외에 개인에게 직접 부여한 미션을 말하는데 집에 가서 하거나 기본적인 업무를 다하고 주로 야근으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이를 우리는 ‘숙제’라고 불렀다. 내게는 주로 경쟁사 분석이나 해외 동향과 같은 리서치 업무가 맡겨졌다.

처음에는 외신을 읽는 것조차 버거웠는데 조금씩 일에 익숙해지고 숙제들을 클리어해 가면서 처음으로 ‘일하는 근육’이 붙는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었다. 이것이 지금 말하는 엉덩이의 힘의 모태가 된다. 정확히 말하면 여기까지는 아직 농업적 근면성을 발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이 과정에서 숙제, 다시 말해 타인의 명령에 의한 미션 수준으로만 받아들인 채 이를 쳐내기에 급급했다면 내게 엉덩이의 힘은 붙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엉덩이의 힘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게 된 사건이 터졌다. 2014년 2월이었다. 당시 일본과 태국 등 해외에서 메신저 앱 라인(Line)이 빵 터지면서 네이버의 주가는 하루가 다르게 치솟았고, 시가총액 순위 10위 안에 들어가더니 결국 4위까지 올랐다. (주식을 사둔 나도 덩달아 흥분했다.) 그는 이러한 시기에 맞춰 새로운 ‘야마’를 발굴해 선제적으로 PR을 하고자 했다.

“영웅아, 우리나라 기업 중에 재벌이나 공기업, 금융기관이 아닌 개인이 설립한 기업이 시총 10위 안에 들어간 적이 있을까? 네이버가 최초 아닐까?”
“이사님, 제가 주식은 잘 몰라서…”
“왠지 없을 것 같은데 확실하게 확인해 보고 자료 뽑아야 되니까 한번 체크해 줘. IR팀에 물어보면 자료 있지 않을까?”

처음에는 크게 어렵지 않은 숙제 아니, 이 정도면 가벼운 심부름 정도로만 생각했다.(그러나 이 일이 그렇게 쉽게 끝났다면 처음부터 이 에피소드를 꺼내지도 않았겠지?)

일단 IR팀에 알아보니 코스피 관련 차트를 따로 기록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특히나 네이버만 필요한 것도 아니고 코스피에 등록된 다른 기업의 데이터는 자신들도 알 수 없다고 했다. IR팀의 의견을 그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는 순간 심부름이 숙제로 변하고 말았다.

“영웅아, 그럼 직접 조사해 봐! 너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 같은 애정결핍이들은 인정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위와 같은 형식의 ‘부탁 명령’을 받으면 용기를 넘어 객기가 생긴다. 일단 포털사이트에 검색부터 시작했다. 키워드를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도 해 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최근 데이터는 있지만 전체를 볼 수는 없었다. DART(전자공시시스템)도 구석구석 뒤져봤지만 원하는 내용은 없었다. 결국 선배들에게 SOS를 쳤지만 모두 불가능할 것이라는 확신이 이어졌다. 미리 애도(?)를 보내는 이도 있었다. 그때 머리를 맴도는 목소리…

‘…너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같은데?…’

멈추고 싶지 않았다. 인맥(?)을 동원해 보기로 했다. 코스피와 코스닥의 차이도 모르는 수준이었던 나는 일단 되는 대로 회계사부터 재무설계사, 트레이더 등 주식, 증권과 관련된 회사에 다니는 모든 지인에게 연락했다. 인맥이라지만 다 친구들이다 보니 그들도 나처럼 회사 내에서 막내라 다들 제 콧물 닦기 바빴다. 그렇게 수소문한 끝에 ‘친구가 다니는 회계법인의 동료의 친구 중에 증권사에서 일하는 이’에게서 해당 차트를 받을 수 있었다.

“심 봤다!”

우여곡절 끝에 엑셀로 정리된 코스피 차트를 받고 ‘이제 됐구나’ 싶은 마음에 메일을 열었다. 엑셀 파일을 내려 받는데…… 무슨 동영상도 아니고 문서인데 용량이 기가바이트(Giga byte)로 표시돼 있었다.

하긴 몇십 년 동안 몇백 개 기업의 시가총액이 정리된 파일인데 용량이 클 수밖에 없겠지. 그래도 실제로 이걸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있자니 하늘이 노래졌다. 파일이 너무 무거워서 커서를 움직일 때는 렉이 걸리기도 했다.

당시에는 기본적인 부서 업무만으로도 벅찬 막내였다. 그런 병아리가 일주일동안 어마어마한 양의 엑셀 시트들을 눈 빠지도록 보고 또 봤다. 그리고 또 봤다. 혹시 놓칠세라 꼼꼼히 차트를 뚫어져라 봤다. 눈알이 빠질 것만 같았다. 글자와 숫자를 보면서 소위 말하는 재벌 계열사나 공기업, 금융업이 아닌 기업이 시총 10위 안에 들어온 것이 있는지 없는지 찾아내기만 하면 되는데…… 이게 그냥 보면 되는 일이니까 어렵지 않은 일인데…… 너무 어려웠다. 그때를 떠올리기만 하면 아직도 속이 메스꺼워진다.

차트를 보면서 이런 생각까지도 했다. 좋은 이슈를 활용하지 못하게 되어 아쉽기는 하지만 차라리 가설을 깨는 기업이 80년대나 90년대에 나타나서 빨리 이 작업을 멈췄으면 하는. 아니면 반대로 2000년대 초반까지 없다가 갑자기 2010년대에 나타나면 허무할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크게 변동 없던 80년대를 지나 97년쯤 오자 시총 Top 10이 요동치면서 자료가 읽기 힘들어졌다. 90년대 후반 차트를 보니 외환위기 시절을 느낄 수 있었다. 요동치는 순위 덕분에 차트 보기가 어려워지고 시간은 더 소요됐다. 파고를 지나 21세기를 맞이했다. 일주일 동안 거의 밤잠을 설쳐가며 차트를 체크했다. 그리고 마침내 아래 문장을 보도자료에 넣게 됐다.

“대한민국 역사상 재벌 계열사, 공기업, 금융업이 아닌 개인이 창업한 기업이 시가총액 10위 안에 든 것은 네이버가 유일하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고, 이 한 줄을 완성하기 위해 밤마다 내 엉덩이는 그렇게 버텼나 보다. (메인 ‘야마’가 아닌 보도자료 아래 첨부되는 박스자료일 뿐이었던 건 비밀)


그놈의 마케팅
저는 가장 세속적인 일을 하는 마케터입니다

저자. 신영웅
출판사. 넥서스B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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