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 비전 프로를 ‘공간 컴퓨터’로 정의한 이유
새로운 변화의 기준이 되기 위한 애플의 전략
지난 2일, 미국에서 애플의 ‘비전 프로(Vision Pro)’가 정식 출시됐다. “현실 세계 및 주변 사람과의 연결성을 유지하면서 디지털 콘텐츠와 물리적인 세계를 어우러지게 한다”며 애플이 자신 있게 선보인 비전 프로는 언뜻 ‘VR(가상 현실, Virtual Reality)헤드셋’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애플은 비전 프로를 홍보하며 VR도, ‘AR(증강현실, Augmented Reality)’도 아닌 ‘공간 컴퓨터(Spatial Computer)’라는 표현을 고집하고 있다. “결코 VR헤드셋은 아니다”라는 입장이다.
요즘 대부분의 자동차에 적용되는 AR 옵션인 ‘HUD(헤드업 디스플레이)’,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VR 체험관’ 등 AR과 VR은 점차 삶 곳곳에 녹아들고 있다. 이렇듯 소비자가 AR, VR에 대해 친숙해지는 가운데, 왜 애플은 굳이 낯선 공간 컴퓨터라는 명칭을 고집하고 있을까? 당장 비전 프로의 경쟁 제품으로 꼽히는 ‘메타 퀘스트3(Meta Quest 3)’도 ‘VR헤드셋’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말이다.
VR 헤드셋이 아니니까
사실 애플이 VR헤드셋 대신 공간 컴퓨터라는 명칭을 고집하는 이유는 VR헤드셋과 공간 컴퓨터가 지칭하는 바를 알면 간단한 이야기다.
먼저 VR헤드셋은 ‘사용자에게 가상 현실을 제공하는 기기’다. 그렇다면 공간 컴퓨터는 무엇일까? 공간 컴퓨터는 ‘디지털 세계와 현실 세계를 확장하고 연결하는 기기’다. VR헤드셋이 디지털 공간에 접속하는 용도로 사용되는 이른바 디지털에 치우친 기기라면, 공간 컴퓨터는 전통적인 평면 화면에서 벗어나 공간 자체가 컴퓨터가 된다는 개념의 ‘공간 컴퓨팅(Spatial Computing)’을 실현하는, 현실에 디지털 요소를 결합시키는 기기로 정리할 수 있다.
그동안 VR기기는 “디지털 세계에 얼마나 현실감 있게 빠져들 수 있는가”에 무게를 두고 발전해 왔다. 최근 메타 퀘스트3 등 여러 VR기기가 AR과 VR의 장점이 결합된 ‘MR(혼합 현실, Mixed Reality)’을 표방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메인이 되는 콘텐츠는 디지털 세계를 기반으로 한 게임 등 엔터테인먼트의 색깔이 강하다.
반면 비전 프로는 게임 등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보다는 현실과 디지털이 결합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시하는 데 무게를 둔다. 실제로 애플의 공식 홍보 영상에서 공개된 비전 프로의 사용 예시는 공중에 여러 가상 화면을 띄워 맥에서 진행하던 과업을 더욱 편하게 수행하거나, 화상 통화 등 디지털로 이뤄지는 소통을 더욱 원활하게 해주는 등 현실 공간의 물리적 제약을 없애는 동시에 기존 디지털 기기에서 확장된 과업 수행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공간 컴퓨터로써 기능하기 위한 완성도
비전 프로 사용자는 가상 공간으로 이동하거나 하지 않는다. 사용자는 비전 프로를 착용해도 보고 있던 현실 세계를 그대로 보게 되고, 현실 공간 위에 원하는 디지털 콘텐츠를 생성해 상호작용한다.
이처럼 현실에 기반하기 위해서는 기기 착용에 대한 불편을 해소하고, 가능한 편안하고 익숙한 사용자 환경을 구축해야 하기 때문에, 애플은 카메라를 거쳐 현실 세계를 투영하고 그 위에 가상의 디지털 콘텐츠를 더하는 ‘패스 쓰루(path through)’ 기술이 상시 켜진 상태로 유지되도록 비전 프로를 설계했다.
패스 쓰루 기술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카메라를 통해 세상을 본다는 이질감이 잘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적은 왜곡과 높은 화질을 제공하는 것은 비전 프로가 유일하다.
더해서 VR기기에 필수적인 컨트롤러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도 비전 프로가 VR기기가 아닌 공간 컴퓨터로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양손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는 기기라면 일상 생활에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전 프로는 양손 사용에 제약을 두지 않기 위해 사용자의 시선을 추적하고, 손가락을 집는 등의 제스쳐를 통해 앱을 통제할 수 있다. 실제로 비전 프로를 착용한 채 지하철을 타거나 요리를 하는 등 일상 생활을 불편함 없이 즐기는 모습을 담은 영상도 여럿 찾아볼 수 있다.
MR헤드셋? 그래도 공간 컴퓨터
메타 퀘스트가 MR기능을 추가해 점차 VR헤드셋보다 MR헤드셋이라는 명칭에 더 무게를 두는 것처럼, 일각에서는 비전 프로 또한 공간 컴퓨터라는 별도의 명칭 보다는 MR헤드셋으로 함께 분류하면 되는 게 아니냐는 의견도 나온다. 상호 작용이 가능한 가상의 물체가 현실에 놓이는 것을 MR로 정의한다면 비전 프로를 MR기기로 분류해도 무방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사실 비전 프로는 MR헤드셋으로 분류돼도 크게 이견이 없을 제품이다. 비전 프로가 선보이는 기능이 MR기기의 정의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애플이 MR헤드셋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공간 컴퓨터라는 독자적인 용어를 고수하는 것은 과거 아이폰을 통해 스마트폰 시대라는 새로운 흐름을 주도했던 사건을 재연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아이폰이 스마트폰이라는 새로운 변화의 기준이 됐듯, 기존의 VR, MR과 차별화된 공간 컴퓨터라는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려는 전략 말이다.
실제로 팀 쿡 애플 CEO는 비전 프로를 공개하며 “맥이 개인 컴퓨터를, 그리고 아이폰이 모바일 컴퓨팅의 시대를 열었던 것처럼 비전 프로는 우리에게 공간 컴퓨팅을 선보이게 됐다. 비전 프로는 사용자에게는 엄청난 경험을, 개발자에게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결국 아직은 프로토타입
팀 쿡 CEO가 자신감을 내비칠 만큼 비전 프로가 제안하는 변화와 미래는 매력적이다. 그러나 아직 완성 단계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업계의 해석이다.
비전 프로는 3500달러(약 466만원)부터 시작하는 높은 가격대와 더불어 2시간가량의 적은 배터리 용량, 장시간 착용에 무리를 주는 600g의 무게 등 개선해야 할 문제가 여럿 남아있다. 맥이나 아이패드의 콘텐츠를 비전 프로를 통해 확장 시킬 수 있는 점은 매력적이지만, 비전 프로만의 콘텐츠가 부족한 점 또한 단점으로 꼽힌다.
결국 비전 프로는 실용성 높은 기기라기 보다는 애플의 기술력과 비전을 나타내는 프로토타입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평소에 애플에 친화적으로 평가 받는 미국 IT 매체 ‘더 버지(The Verge)’는 비전 프로 리뷰에서 “본 중 가장 뛰어나지만 완벽하지 않다”고 평가하는 동시에 “아직은 HDMI 입력이 없는 매우 비싼 TV”라며 비전 프로의 부족한 실용성을 비판하기도 했다.
차세대 모델서 공간 컴퓨터의 실용성 입증해야
현재 SNS에 활발히 공유되는 비전 프로 관련 영상은 대부분 재미와 농담의 성격이 강하다. 일부는 “에이팟이 그랬듯 지금은 낯설지만 곧 모두 비전 프로를 착용하고 있을 것”이라며 비전 프로가 미래를 바꿀 것이라는 기대감을 이야기하지만, 많은 공감을 받는 반응은 대체로 “너무 비싸서 꼭 필요한 지는 모르겠다” 등 아직 충분히 보급되기 어려운 가격 등의 단점을 지적하는 내용이다.
애플이 공간 컴퓨터를 통해 미래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차세대 비전 프로가 어떻게 출시될지가 관건이다. 이번 비전 프로가 디지털과 현실이 결합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안해 놀라움을 선사했다면, 다음 세대에서는 실제로 많은 이들의 삶에 녹아들 만한 공간 컴퓨터의 실용성을 충분히 입증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