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선금도 없이 일해왔어요” 광고 업계, 불공정 관행에 입 열다
광고인이 피부로 느낀 불합리함과 어려움
과거 인기를 끈 tvN의 드라마 ‘미생’의 후반부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있다. 바로 ‘꽌시(關係, Guanxi)’다. 꽌시는 직역하면 ‘관계’라는 의미인데, 신뢰, 호혜 등 인간적인 관계를 중요시 생각하는 문화가 중국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 만큼, 관계에 무게를 두는 사고가 중국사회의 상호작용과 비즈니스에 있어서도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비추는 용어다.
동시에 꽌시는 관계 형성을 위한 노력과 행위를 일컫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미생에서 꽌시가 중국 업체와의 관계를 위한 ‘리베이트’에 가까운 의미로 사용된 게 대표적인 예다.
꽌시는 중국 사회에서는 당연한 문화 요소지만, 외부의 시선에서는 낯설거나 불합리한 관행으로 해석기도 한다. “왜 비즈니스에서 관계 형성을 위한 인간적인 노력을 수반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생길 수도 있다. 이처럼 비즈니스에는 오랫동안 내려와서 굳어진 다양한 ‘관행’이 비일비재 한데, 이러한 관행은 때로는 문화적 요소로 이해되지만 때로는 산업 성장을 저해하는 장애물로 작용하기도 한다.
국내에서도 그간 많은 산업이 굳어진 여러 관행을 개선해 산업이 더욱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해왔는데, 최근에는 ‘광고 산업’이 오랫동안 뿌리내린 관행이 야기하는 어려움에 대해 토로하고 있는 상태다.
실제 지난 4일 한국광고문화회관에서 열린 ‘광고산업진흥법’ 제정을 위한 광고인대회에서 광고산업상생 분과장을 맡은 백승록 메조미디어 대표 또한 “산업 경쟁력 저하로 이어지는 여러 좋지 못한 관행과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법적인 보호 장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전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광고 산업에 종사하는 실무자들이 피부로 느끼는 불합리한 관행과 어려움에는 무엇이 있을까? 직접 광고 산업에 종사하는 실무자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애니메틱 제작에만 1000만원… PT 비용 부담 문제
많은 관계자가 가장 먼저 입을 모은 건 바로 ‘PT(Presentation)’다. 광고주는 보통 광고 대행사 등을 대상으로 경쟁 PT를 연다. 제작할 광고에 대한 여러 기업의 기획안을 비교해보고 그 중 가장 목표에 부합한 광고를 제작할 수 있는 기업을 선택하기 위해서다.
업계 관계자들이 문제를 제기하는 건 그 과정 안에 여러 불합리한 관행이 녹아 들어 있다는 것인데, 가장 먼저 살펴볼 건 경쟁 PT에 소모되는 비용이다. 한 광고 대행사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대행사는 평균적으로 PT에 사용될 기획안 제작에 3000만원가량을 소비한다. 비용이 이처럼 높은 까닭은 그 안에 관행적으로 포함돼야 하는 요소가 많기 때문인데, 대표적인 게 바로 ‘애니메틱(Animatics)’이다.
애니메틱은 콘티나 스토리보드의 동작이나 동선을 시각화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광고 기획안을 미리 간단하게 만들어 상영하는 셈이다. 익명의 관계자는 이에 대해 “해당 작업에만 기획, 가편집, 시사회의 과정이 요구되며 제작 비용도 1000만원을 상회해 부담이 큰 편”이라 밝혔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광고 업계가 제안하는 건 ‘리젝션 피(Rejection Fee)’다. 리젝션 피란 경쟁 PT에 탈락한 기업에 광고주가 일정 비용을 보상하는 것인데, 기업 면접에 참여할 때 불합격해도 면접비를 제공하는 것으로 비유하면 이해하기 쉽다. 다만 아직 PT에 대해 리젝션 피를 제공하는 광고주는 많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공정한 경쟁 위한 가이드라인 마련도
공정한 PT인지, 그 과정을 확인할 수 없는 점 또한 문제로 꼽힌다. 한 미디어렙사 관계자는 “PT 결과에 대해 수주한 업체의 최종 점수 외에 뚜렷한 선정 이유를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는다”고 지적했는데, 이 부분이 문제가 되는 까닭은 자칫 경쟁 PT 자체가 RFP(Request for Proposal, 제안요청서)에 맞는 좋은 미디어 전략과 아이디어로 경쟁하는 게 아닌, 수수료를 낮추는 단가 경쟁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 광고인대회에서도 분과위원회의 발의 중 “어려운 환경 속 생존을 위해 수수료를 낮추는 식의 과잉 경쟁이 이뤄지고 있다”며 “이러한 현실은 결국 광고 산업 전반의 기준과 경쟁력을 낮추고 말 것”이라 강조한 바 있다.
광고주가 업체 선정 이유 등 경쟁 PT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 건 이외에도 여러 문제를 야기할 가능성이 있다는 게 업계인들의 설명인데, 익명을 요구한 한 광고 업계 관계자는 “광고주가 낮은 수수료를 이유로 A기업을 선정하고 떨어진 B회사가 제안한 아이디어를 A회사에 전달해 광고를 제작해도 B기업은 대가 없이 아이디어가 사용되는 행태에 대해 아무런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상태”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한 미디어렙사 관계자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수주한 업체에 대해 단순히 점수가 아닌 구체적인 선정 이유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타사의 전략과 아이디어를 도용할 수 없도록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세워져야 한다”며 변화를 촉구했다.
대금 지급 방식도 개선돼야
경쟁 PT와 함께 업계인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또 다른 불공정 관행은 바로 ‘대금 지금 방식’이다.
부동산을 매매하거나 업체에 인테리어를 맡길 때 ‘선금’ ‘중도금’ ‘잔금’의 구조를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프로젝트의 시작과 중간, 그리고 종료 이후에 나눠 금액이 지급되는 구조는 잔금의 존재를 통해 작업이 완료될 때까지 작업을 담당하는 업체의 책임감 있는 태도를 약속 받을 수 있는 장치로 작용하는 동시에 선금과 중도금의 존재로 작업을 이행하는 업체의 금전적 부담을 완화시킬 수 있다.
해당 구조는 현재 일반적인 외주 작업 계약서에도 사용될 만큼 보편화된 구조다. 그러나 광고 업계의 경우 별도의 선금과 중도금 없이 잔금만 치르는 구조가 관행으로 굳어져 있어 업체의 부담이 가중되는 상태다.
한 광고 대행사 관계자는 이러한 구조에 대해 “잔금만 존재하기 때문에 캠페인을 진행하며 캠페인 제작에 드는 비용을 떠안는 것은 물론, 잔금마저도 캠페인 완료 후 3~6개월이나 지나야 지급 받는 경우가 흔하다”고 꼬집었다.
아울러 그는 “이처럼 잔금만 존재하는 계약 구조는 혹여 광고를 의뢰한 기업이 도산되는 등 예기치 못한 상태가 발생할 경우 밀린 대금 전체를 돌려 받기 어려운 불상사로 이어질 수도 있다”며 관련해 구조적인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미디어렙사의 광고비 지급 구조 또한 문제로 제기됐는데, 익명의 미디어렙사 관계자는 “보통 미디어렙사는 매체사에 광고비를 지급하고 해당 광고 비용을 광고대행사에 청구한다. 이 과정에서 미디어렙사는 대행사에 여신을 부여하는데, 광고주나 광고 대행사의 부도 등 여신 기일 동안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는 모두 미디어렙사가 책임진다”며 “이처럼 모든 리스크를 미디어렙사가 지는 건 불합리한 처우”라고 전했다.
완전무결한 산업이란 존재하지 않겠지만
미처 기사에 다루지 못한 이야기를 포함해 광고 업계 관계자들이 체감하는 문제는 다양했다. 이처럼 광고 업계에서 어려움을 토로하는 목소리가 쏟아져 나오는 건 그동안 광고 업계가 보호 받고 기댈 수 있는 안전 장치가 미비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앞서 광고인대회에서 촉구한 ‘광고산업진흥법’의 경우 지난 21대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해 이번 22대 국회에 다시 도전하는 상태고, 당장 공정거래위원회에 광고 관련 담당 부처나 전문가가 없는 상태에서 비춰볼 수 있듯 잔금 미지급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도움을 요청할 마땅한 정부 기관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다.
과거 나치에 반대한 독일의 목사 마르틴 니묄러(Martin Niemöller)는 자신의 시 ‘그들이 처음 왔을 때(First They Came)’에서 나치에 거듭 침묵하다 마침내 그들이 자신을 덮쳤을 때 “나를 위해 말해줄 이들이 아무도 남지 않았다”며 무관심의 위험성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 부당한 관행과 처우가 존재하지 않는 무결한 산업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광고 업계가 입을 모아 주장하는 바가 산업이 건강히 성장할 수 있는 보호 기반 마련인 만큼, 무관심으로 일관하기 보다는 그들의 이야기에 한번쯤 귀 기울여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