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을 넘어, 일상 속 인간의 경험과 맥락을 읽다” HCI 2026 참관기
AI 시대 일상과 이상을 잇는 실무자들의 이야기

지난달 26일, 강원도 홍천엔 영하 13도까지 떨어지는 한파가 몰아쳤지만, HCI 2026 학술대회 현장은 이른 아침부터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찼다. 옷깃을 여미며 행사장에 들어선 수백여 명의 참가자들은 디자이너, 개발자, 기획자, 그리고 관련 학과 학생들까지 배경은 다양했지만, 모두 공통된 갈증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AI가 단순한 ‘신기한 도구’를 넘어 우리의 ‘동료’이자 ‘일상’으로 깊숙이 침투한 지금, 인간과 컴퓨터의 상호작용(HCI)과 사용자 경험(UX)의 현황을 짚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고 싶다는 열망이었다.
올해 HCI 2026 핵심 키워드는 ‘일상’과 ‘이상’ 그리고 ‘상상‘이었다. 이런 키워드에 따라 올해 학회에선 신기술의 스펙이나 혁신성 대신, AI가 인간의 삶에 얼마나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소외와 불편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한 실무적이며 인문학적인 고민들이 쏟아졌다.
현장에는 AI 에이전트와의 협업 워크플로우부터 생성형 AI 기반 검색 서비스의 진화, 그리고 기술이 사용자에게 가하는 폭력인 ‘디지털 갑질’에 이르기까지, 기술의 이면에 있는 인간을 향한 깊은 질문들이 던져졌다. 특히 글로벌 빅테크 기업과 경쟁하는 국내 기업들의 생존 전략과, AI라는 강력한 도구를 손에 쥔 실무자들이 가져야 할 전략과 태도에 대한 논의는 그 어느 때보다 치열했다.
창작자 넘어 에이전트 보스가 되어가는 디자이너

먼저 첫날 튜토리얼 강연을 담당하며 학회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유훈식 서울미디어대학원대학교(SMIT) 교수는 튜토리얼 강연을 통해 AI 시대 디자이너의 역할 변화에 대해 구체적이고 실무적인 현황과 방향을 제시했다.
유훈식 교수는 “이제 디자이너는 직접 픽셀을 찍고 그림을 그리는 ‘창작자’를 넘어, 다양한 AI 팀원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지휘하는 ‘에이전트 보스(Agent Boss)’이자 ‘오케스트레이터(Orchestrator)’가 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는 AI 시대 디자이너의 역할이 단순한 시각적 창작자에서 ‘설계자’이자 더 나아가 ‘관리자’로 확장됨을 의미한다.

그는 발표 서두에서 2022년 6월 생성형 AI 이미지를 표지로 사용한 코스모폴리탄 잡지, 미 저작권청으로부터 저작권을 승인받은 문자 이미지 변환 AI 기반 만화 ‘새벽의 자리아’, 미국 디지털 아트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논란과 화제를 동시에 낳았던 ‘스페이스 오페라 극장’, 토스의 AI 그래픽 생성기 토스트(Toast)에 이르기까지 숨 가쁘게 달려온 생성형 AI의 역사를 짚었다.
또한 유훈식 교수는 11번가, GS25, 삼성생명, 토스, 이케아 등 국내외 기업들이 마케팅과 서비스 전반에 미드저니, 런웨이, 비오3(VEO3) 등 다양한 AI 도구를 얼마나 공격적으로 도입하고 있는지 보여주며, “이제 AI 활용은 선택이 아닌 필수 전략”임을 강조했다.

이어 유훈식 교수는 이날 강연에서 미드저니, 런웨이, 그리고 최근 주목받는 ‘나노 바나나’ 모델 등 다양한 AI 툴을 마치 인간 디자인 팀원처럼 소개하며, 이들을 조합해 팀을 꾸리는 방법을 소개 및 시연했다. 유훈식 교수는 이를 AI 에이전틱 시대 새로운 워크플로우라고 설명하며, “디자이너는 이제 한 땀 한 땀 그리는 것이 아니라, AI 도구들을 연결하는 파이프라인을 설계하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조언했다.
강연 막바지, 유훈식 교수는 단순히 툴 사용법을 알려주는 것을 넘어, 디자이너의 정체성과 미래에 대한 새로운 화두 또한 던졌다. 그는 “이젠 우리가 디자인을 넘어 개발의 영역에 도전할 수 있는 시기다. 가능하면 직접 하기보다는 AI에게 일을 어떻게 시킬지를 잘 결정해서, 누구를 나의 팀원으로 데려올 것인지, 우리 팀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AI 시대, 기존의 가치와 장점 놓치지 말아야

이번 학회에선 무작정 AI 트렌드를 쫓기보단 기존 경험에 대한 가치를 강조하고, 자체적인 생존 전략을 탐구한 사례가 여럿 발표됐다. 이번 학회에 참가한 네이버 역시 마찬가지였다. 첫날 키노트 세션에 연사로 나선 김상범 네이버 AI 검색 담당 전무는 1999년 첫 출시 이후 2025년까지의 역사를 짚어가며 챗GPT의 등장 이후 불거졌던 ‘검색의 종말론’을 중점으로 AI 시대에 토종 검색 포털인 네이버가 어떻게 생존하고 진화할 것인지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했다.
이날 그는 “검색은 끝났다”는 생성형 AI 등장 초기의 평가 속에서도 네이버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검색 사용자들이 가진 독특한 습관과 네이버가 구축해 온 데이터 및 콘텐츠 생태계에 대한 확신 때문이라 설명했다.
특히 김상범 전무는 “사람이란 하나의 페르소나만으로는 정의할 수 없다. 인간은 굉장히 입체적이다”라며, 검색부터 쇼핑, 예약, 결제까지 이어지는 네이버의 올인원(All-in-One) 생태계야말로 사용자의 맥락을 가장 정교하게 파악하고, 그에 따른 콘텐츠를 제공할 수 있는 핵심 자산이라고 말하며 네이버가 한국 사용자의 입체적인 데이터를 가장 잘 이해하는 서비스라고 강조했다.

또한 김상범 전무는 이날 발표에서 AI 시대 고전적인 검색만의 경험 특징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바로 ‘학습과정으로서의 검색(Search as Learning)’ 개념이었다. 김상범 전무는 “사용자는 단순히 정답 하나만을 원해서 검색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구체적인 예시를 들었다. 예를 들어 ‘스승의 날 어린이집 선생님 선물’ 같은 키워드를 입력할 때, 사용자는 AI가 내놓는 “3만 원대 핸드크림이 좋습니다”라는 요약된 정답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인간 사용자들의 후기나 추천 등을 원한다는 말이었다.
이에 대해 김상범 전무는 “사용자들은 다른 학부모들의 구체적인 고민이 담긴 카페 게시글을 읽고, 블로그 후기를 비교하며, 그 과정에서 암묵적인 지식을 습득한다”고 설명했다. 즉, 검색은 단순한 정보 획득이 아니라, 타인의 경험을 통해 나의 판단을 검증하고 새로운 지식을 학습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이야기였다.

물론 네이버가 이번 학회에서 AI 트렌드를 전면 부정하고 기존 경험만 강조한 것은 아니다. 이날 김상범 전무는 앞서 설명한 검색 사용자 니즈를 충족시키면서도 AI의 효율성을 접목하기 위한 ‘AI 에이전트’ 전략의 미리 보기도 공개해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가 미리 선보인 네이버의 새로운 에이전틱 서비스는 사용자의 복잡한 의도를 파악해 검색 결과를 요약해 주는 ‘AI 브리핑’ 기능과, 쇼핑 이력 및 예약 정보를 바탕으로 개인화된 추천을 제공하는 에이전트 서비스였다. 강연 말미, 그는 “기술 격차는 줄어들고 있다. LLM의 성능은 상향 평준화될 것이며, 결국 승부는 누가 더 한국 사용자의 맥락을 잘 이해하고,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를 제공하느냐에서 갈릴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기술의 언어가 아닌 경험의 언어로 말해야 할 때

이번 학회에선 AI 시대에 인간의 경험이 아닌 기술 중심적인 언어로 소통을 하려고 하는 업계를 진단하고, UX의 본질인 사용자와 고객의 경험을 강조한 세션도 여럿 찾아볼 수 있었다. 둘째 날 키노트 세션에서 홍성준 뱅크샐러드 디자인 총괄 이사가 무대에 올라 기술 중심의 사고를 경험 중심의 사고로 전환해야 함을 호소했다.
이날 단상에 오른 홍성준 이사는 시작부터 현 업계 상황을 음식은 물론 포장까지 소스를 뿌리는 밈(Meme) 영상에 빗대며 “지난 3년간 우리는 AI를 음식에도 넣어보고, 포장지에도 발라보며 온갖 곳에 AI를 적용하려 애썼다. 그렇게 세계적으로 2500조 원이 넘는 돈이 AI 개발에 쏟아부어졌지만, 정작 사용자는 ‘그래서 내 삶이 얼마나 나아졌는데?’라고 묻고 있다”며 뼈 있는 농담으로 발표를 시작해 청중들의 웃음 자아냈다.


이어 홍성준 이사는 현재의 AI 서비스들이 겪고 있는 ‘투자 대비 효과(ROI)의 딜레마’를 지적했다. 많은 기업들은 세상에 없던 신기술과 생산성 향상을 외치지만, 사용자들의 실제 만족도(NPS)는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구글 본사에서 어시스턴트 디자인을 담당했던 경험과 현재 뱅크샐러드에서 진행 중인 선행 연구 사례를 공유하며, ‘기술의 언어’가 아닌 ‘경험의 언어’로 소통할 것을 조언했다.
이 과정들을 통해 느꼈던 것을 다음 한 줄에 다 담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신기술이 아니라, 나의 일상, 나의 오늘을 도와줄 수 있는 순간이 있는 서비스라는 것이죠.
모두가 세상에 없던 신기술을 외치지만 실제로 체감하기 전에는 모릅니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 아주 단순하고, 사소한 것이라도 내 일상 속에서 도움이 됐다고 느낀 순간 사용자는 그 서비스를 더 경험하고 체험하게 돼 있습니다.”
특히 그는 자신이 직접 겪었던 삼성전자 서비스센터 AI 상담원과의 일화를 소개하며 현장의 큰 공감을 샀다. 한파에 자동차 배터리가 방전돼 급하게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걸었고, AI 상담원과 연결됐지만 상황과 대화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AI가 전화를 끊어버린 것이다. 그는 “추위에 떨며 엘리베이터 안에서 상담원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데, 엘리베이터 안내방송인 ‘문이 닫힙니다’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AI가 이를 상담 종료 신호로 오인해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며 전화를 끊어버렸다”고 당시의 황당했던 상황을 전했다.
회고를 마친 그는 아무리 뛰어난 기술이라도 사용자의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면 오히려 사용자 경험을 해치는 단점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며, 인공지능이 분명히 빨라졌고 압도적으로 똑똑해지고 있는 AI 시대에도 여전히 많은 사용자가 인간과의 소통을 원하고, 사람이 만든 서비스를 선호하는 현황과 이를 위한 에이전틱 서비스의 핵심 UX 3요소를 공유했다.

그가 제시한 에이전틱 UX의 핵심 요소는 ‘선제적(Proactive)’, ‘자율적(Autonomous)’, ‘실천적(Practical)’이었다. 요컨대 사용자가 “배터리가 방전됐어”라고 말하기 전에 한파 정보를 바탕으로 배터리 상태를 점검하라고 선제적으로 알림을 주고, 사용자의 위치와 보험 정보를 파악해 가장 가까운 기사를 자율 호출하며, 실제 출동 예약과 결제까지 완결 짓는 실천적인 에이전트야말로 진정한 경험의 혁신이라는 것이다.
발표 후반부 그는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현재 뱅크샐러드가 제작해 고도화 중인 라이프 매니지먼트 에이전트 ‘토핑’를 제시했다. “뱅크샐러드는 금융 서비스는 물론 건강 서비스까지 아우르며 사용자를 가장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설명한 홍성준 이사는 “단순히 자산 현황을 그래프로 보여주는 화면(GUI) 중심의 서비스를 넘어, 에이전트가 데이터의 맥락을 읽고 사용자에게 먼저 말을 거는 인터페이스로 나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당연한 불편함이란 있을 수 없다

이번 학회에 AI 신기술 트렌드와 관련한 발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책임을 강조한 여러 강연도 참가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중에서도 이동석 레인메이커 DNC 대표가 진행한 튜토리얼 강연은 업계 뒷면에 자리 잡은 잘못된 관행을 꼬집으며 오늘날 업계가 놓치고 있는 사용자의 불편함을 조명했다.
이날 이동석 대표는 키오스크 앞에서 주문을 못해 쩔쩔매는 노인 사용자, 운전 중 내비게이션 화면을 가려버리는 재난 문자, 복잡하고 까다롭기 그지없는 공공기관 웹사이트 등을 ‘디지털 갑질’이라고 명명하며 강연을 시작했다.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소프트웨어나 서비스가 사용자에게 불편함을 강제하는 것은 사용자에게 가하는 인지적 폭력이자 갑질이라는 해석이었다.

실제 해당 강연에서 이동석 대표는 우리가 일상에서 피할 수 없이 사용해야 하는 서비스들이 사용자들에게 가하는 여러 디지털 갑질을 지적했다.
이날 그가 지적한 대표적인 ‘디지털 갑질’의 사례는 제대로 된 검색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아 정부 과제 확인이 어려운 나라장터, 문서 여백 및 문서 작성 도구를 MS 오피스 2013 이하 버전만 강제하는 우체국 내용증명, 제대로 된 스팸 메시지함을 제공하지 않는 카카오톡 등이 있었다. 그는 “이러한 서비스들은 사용자가 ‘안 쓰면 그만’이라는 선택을 할 수 없는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학습과 인내라는 비용을 사용자에게 전가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이러한 현상이 반복되는 원인으로 ‘기능 구현을 서비스 완료로 착각하는 공급자 중심의 사고’와 ‘형식적인 사용성 테스트’를 꼽았다. 대부분의 프로젝트가 기능이 작동하는지만 검수할 뿐, 사용자가 실제로 얼마나 편하게 쓸 수 있는지는 뒷전이라는 것이다. 그는 “지금도 구현 기능 목록 리스트만 들고, 어떻게든 기능이 작동하기만 하면 문제 없음 처리하는 곳이 태반”이라며 현장의 관행을 꼬집었다.
여러 서비스들의 디지털 갑질 문제들을 짚은 이동석 대표는 강연에서 자신이 생각한 해결책도 공유했다. 이날 이동석 대표는 해결책으로 ‘체크리트’ ‘사용자 중심의 개발 프로세스 준수’ ‘용어 순화’ ‘VoC 분석’ ‘UX 프로토타입’ ‘사용자 학습 자료 파악’ 이라는 현실적인 방법들을 제시했다. 그는 “독점적 소프트웨어일수록 체크리스트를 기반으로 한 객관적인 사용성 평가가 필수적이다”며 “개발이 절반 이상 진행된 뒤에야 화면이 나오는 현재의 프로젝트 관행이 문제”라고 지적하며, 기획 단계부터 실제 사용자를 고려해 제작 과정 중 실시간으로 사용성을 검증하는 프로세스가 정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디지털 갑질의 정의와 원인, 해결책까지 짚은 이동석 대표는 최전선 현장에서 뛰는 실무자들은 물론 UX 전문가가 되고 싶은 학생이나 취준생들에게 제언하며 발표를 마무리했다.
불편함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이정도면 괜찮아”말하게 되는 익숙한 불편함을 극복하세요. 디지털 갑질은 스스로 불편을 자각하고, 함께 나누고, 공감할 수 있는 조직에서부터 사라집니다.
또 혹시 여기 UX 전문가가 되고 싶으신 학생이나 취준생 분들은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디지털 갑질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제를 수행하거나 작지만 진짜 문제를 해결하는 경험을 쌓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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