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딧쓴님의 아티클 더 보기

트렌드

버추얼 휴먼이 펭귄이면 안 될까?

버추얼 휴먼이 전달할 수 있는 경험과 전달할 수 없는 경험

‘버추얼 휴먼’ ‘가상 인간’ ‘디지털 휴먼’ ‘메타 휴먼’ ‘사이버 휴먼’ 등 이름은 다양하지만, 모두 그래픽으로 만든 인간입니다. 무신사의 무아인, 볼보의 호곤해일, 롯데칠성의 류이드, 신한라이프의 로지까지… 버추얼 휴먼은 이제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존재입니다.

기업은 왜 버추얼 휴먼을 모델로 쓰려고 할까요? 우선 버추얼 휴먼이 인기 있는 연예인보다 모델료가 저렴합니다. 또한 젊고 아름다운 모습을 영원히 유지하죠. 음주 운전이나 학교 폭력 같은 윤리적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니, 리스크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스케줄 조절에 어려움을 겪거나, 갑질 논란이 생길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유들이라면 버추얼 휴먼은 인간의 모습일 필요가 없습니다. 말썽을 일으키지 않는 건 버추얼 펭귄도, 버추얼 코끼리도 마찬가지니까요. 오히려 버추얼 펭귄이 더 귀여울 수도 있는데, 버추얼 휴먼은 왜 인간이어야 할까요?

현재 활동하고 있는 버추얼 휴먼(출처. 한경닷컴)

버추얼 휴먼이 줄 수 있는 경험

우리는 익숙한 대상에게 친숙함을 느낍니다. 버추얼 휴먼이 앞다퉈 ‘좀 더 인간처럼’을 추구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실제 인간 같은 버추얼 휴먼은 우리에게 친숙함을 주기에, 기업은 점점 더 사실적인 버추얼 휴먼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친숙함을 고려하지 않고 버추얼 휴먼을 제작한다면, 펭귄뿐 아니라 다양한 버추얼 휴먼이 탄생할 수 있습니다.

괴수 불가사리를 무찌르는 버추얼 휴먼 ‘읏맨’(출처. OK금융그룹)

소비자 역시 ‘인간과 얼마나 닮았는가’를 중요히 여기지만, 기업 입장과는 다릅니다. 버추얼 휴먼이 인간과 비슷해질수록 경험할 수 있는 감정은 친숙함만이 아니거든요. 어딘가 어설픈 버추얼 휴먼은 우리에게 불쾌감을 줍니다. 이런 현상을 ‘불쾌한 골짜기’라 하는데, 지금의 버추얼 휴먼은 이 단계를 넘어섰습니다.

우리는 현재 활동하고 있는 버추얼 휴먼에게 신선함을 느낍니다. 정교한 기술에 감탄하고, 인간처럼 대우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가상의 존재를 실존하는 것으로 여기는 암묵적 약속에 익숙하니까요. 버추얼 휴먼의 인기는 신선함을 느끼는 단계까지 왔습니다. 하지만 친숙함과 신선함은 각각 명확한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암묵적 합의에 큰 역할을 한 세계관 코미디 장르(출처. 피식대학)

언제까지 ‘똑같이’를 추구할 수 있을까?

인간의 형상을 한 버추얼 휴먼은 한 가지 어려움에 봉착합니다. 바로 우리가 ‘인간처럼’이라는 디테일에 민감하다는 점인데요. 우리가 살면서 가장 많이 보는 존재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인간 형상’ 데이터를 갖고 있고, 버추얼 휴먼의 어색한 부분을 쉽게 발견할 수 있죠. 이 점은 버추얼 펭귄에게 불쾌한 골짜기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펭귄이나 코끼리는 현실과 조금 달라도 크게 어색하지 않거든요.

실제 펭귄 무리와 펭귄 인형(출처. BBC)

그러다 보니 버추얼 휴먼은 더 정교하게 인간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똑같이’라는 방향성은 지속적으로 추구할 수 없습니다. 똑같음이 주는 신선함은 머지않아 끝나기 때문이죠. 언젠가 인간으로 착각할 만큼 똑같은 버추얼 휴먼이 더 이상 신기하지 않을 때가 올 겁니다. 사진 기술의 발명과 함께 사실처럼 그릴 필요가 없게 된 것처럼, 버추얼 휴먼에 대한 관심과 수요가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과연 버추얼 휴먼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기술 발전이 성능 경쟁을 넘어선 때부터는 다른 차원의 기준이 필요합니다. ‘더 신선하게’ 보관하는 냉장고는 이제 소비자에게 새로운 매력을 어필하기 힘듭니다. 냉장고라면 신선하게 보관하는 것이 당연해졌으니까요. 지금의 냉장고는 디자인 경쟁이 한창입니다. 사실적으로 그릴 필요가 없어진 미술은 표현과 의미 등의 고차원 영역을 향해 진화했습니다. 인간과 똑같은 버추얼 휴먼이 등장했을 땐, 버추얼 휴먼 제작업계는 현실에 있을만한 세계관으로 익숙함을 주기 위해 경쟁할까요?

버추얼 휴먼이 줄 수 없는 경험

신선함이 사라진 버추얼 휴먼에겐 친숙함만 남았습니다. 이 친숙함엔 한 가지 요소가 빠졌는데, 바로 ‘실존감’입니다.

인간과 흡사한 버추얼 휴먼 ‘루이 리’(출처. 디오비 스튜디오)

인간과 똑같은 버추얼 휴먼은 대상이 실물인 듯한 ‘실재감’을 선사합니다. 하지만 여기엔 대상이 실제 존재하는 느낌인 ‘실존감’이 빠졌습니다. 실재감과 실존감은 한 글자 차이지만, 느껴지는 간극은 큽니다. 버추얼 휴먼과는 상호작용을 할 수 없고, 관계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소셜 미디어에서 이뤄지는 버추얼 휴먼 대역과의 소통은 인간 간의 상호작용이라 보기 어려우니까요. 버추얼 휴먼은 무대에서 넘어지거나, 갑자기 날아든 벌레를 보고 놀라지 않습니다. 이런 장면은 아직 연출로만 가능하기에, 버추얼 휴먼이 인간스러울 순 있어도 인간다울 순 없는 것입니다.

아이돌과 인플루언서 산업의 핵심은 실존감입니다. ‘이렇게 잘생기고 예쁜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구나’ ‘얼굴도 예쁜데 마음씨까지 곱다니’라는, 세상에 대한 아름다운 믿음과 환상을 주는 것이 인플루언서의 핵심 가치이지 않을까요?

실존감은 유일하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인간은 특정 시간, 특정 장소에 오직 한 명만 존재합니다. 아무리 닮았더라도 다른 사람이라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 한 명뿐인 그 사람과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싶어, 팬미팅이나 콘서트에 갑니다. 첨단 기술로 만들어진 버추얼 휴먼은 얼마든지 복제가 가능합니다. 이 문제는 보안 강화와 NFT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버추얼 휴먼을 고유한 존재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죠. 또한 버추얼 휴먼은 동시에 다른 공간에서 여러 명으로 존재할 수도 있으니까요.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한 장면(출처. 소니픽쳐스)

이 글에선 버추얼 휴먼의 기술적 한계가 아닌, 경험적 한계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래픽 또는 딥 페이크로 만든 얼굴이거나, 인공지능을 통해 대화하는 등의 다양한 기술 방식으로 탄생한 버추얼 휴먼이 계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생생한 구현’의 경쟁이 끝나면, ‘버추얼 휴먼을 어떻게 경험하게 되는가?’라는 문제가 남게 될 것입니다. 버추얼 휴먼이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든 가상 인간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과연 우리는 실존하지 않는 대상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또한 자유 의지가 없는 존재도 단일 개체로 실존한다고 볼 수 있을까요?

기술은 언제나 가장 먼저 진보하고 그 이후에 인식과 문화, 마지막으로 법과 제도가 정비됩니다. 인플루언서가 버추얼 휴먼으로 대체되는 동안, 한편에선 인공지능이 그림과 글을 창작하고 있습니다. 완벽한 지능과 자유 의지를 갖춘 버추얼 휴먼이 등장하게 된다면, 인간은 그들을 필요로 할까요? 기술적 문제가 해결된다면, 사회에서 버추얼 휴먼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생물학적 인간의 의미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이젠 우리의 인식과 문화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습니다.

섬네일 디자인. 최지욱 디자이너 ckalibt@ditod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