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X & Design

제작 과정 중심의 한글디자인 배우기

2017 12. 계획

뜬금없는 생각이지만 만약 1년 뒤에 내가 죽는다면 남은 기간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봤다. 사람은 남은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할 때, 자기가 진짜 좋아하는 것을 찾고 현재에 더 충실하게 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생각이 있었지만, 대학 시절 로망이었던 한글 폰트를 만들기로 했다.

2,500자 정도만 그려도 된다는 사실과 한글디자인 교육을 하는 곳을 찾은 것이 큰 이유였다. 대학 때에는 배울 사람도 없고 혼자 재미 삼아 그리다가 1만 자를 그려야 된다는 압박에 아이디어 스케치만 하다가 포기를 반복했다. 어려움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고 도전해보기로 했다. 이 글은 한글디자인에 대한 지식보다 ‘제작 과정’ 중심으로 기록했다.

한글 타이포그라피 학교

조합식 한글 디자인 기초: 폰트 제작 프로그램 익히기, 간단한 형태의 조합식 한글 폰트 제작
활자 디자인 1-기획: 유용한 한글 활자 제작 기획, 완성형 한글 30자 그리기 목표
활자 디자인 2-이론과 실제(100자): 이론을 학습하는 과정에서 한글 100자 내외 디자인

여러 강의 중 이 세 가지가 눈에 들어왔는데, 아무래도 폰트 제작 프로그램도 배워야 하고, 기초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조합식 한글 디자인 기초’를 선택했다.

2018년 1월. 조합식 한글 디자인 기초 수업 시작

첫 수업 스케치

첫 시간은 첫 닿자(ㄱ, ㄴ, ㅁ, ㅅ, ㅇ) 다섯 개를 주어진 그리드 노트에 아이디어 스케치를 하는 시간이었다. 뻔한 스케치만 쏟아져 나왔지만 오랜만에 하는 거라 재미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아이디어 스케치 중 하나를 고르고 나면 조합 규칙을 정하고, 모임꼴 활자를 스케치하며 Fontlab 5의 사용법을 배웠다. 참고로 요즘은 Glyphs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용어 설명: 초성, 중성, 종성을 우리말로 ‘첫 닿자’, ‘홀자’, ‘받침 닿자’라고 부른다.

먼저 조합 규칙을 설정한다. ‘몸, 묨, 뭄, 믐, 뮴’이 같은 11번으로 되어있는 건 이 모임은 같은 ㅁ 을  첫 닿자를 사용하겠다는 의미다. ‘맘, 먐, 멤… 몜’은 같은 ‘ㅁ’ 받침을 사용하겠다는 표시다.

모임꼴을 스케치하며 조합 규칙을 적용해본다. 모눈종이에 두께와 자소의 크기를 생각하며, 조합 규칙이 결정되면 단어 스케치를 한다. 완성도가 만족스럽지 않아 스트레스 받지만, 어차피 배움의 첫 단계인 기초반이다. 이런 프로세스 경험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

드디어 스케치를 Fontlab 5 에 올려본다. 정해진 규칙대로 선생님이 파일을 설정해 주셨는데, 세로 모임꼴 ‘몸’의 첫 닿자 ‘ㅁ’을 받침에 상관없이 같은 모양으로 사용하기로 했다면 하나만 그려도 ‘목몬몯몰…. 뫃’의 첫 닿자가 자동으로 채워진다. 경제성 면에서 굉장히 탁월하다.

출력해보면서 수정을 하는 과정이다. 계속 닿자와 홀자를 채우다 보면 금세 문장이 완성된다. 조합형의 매력인 것 같다.

이런 과정으로 6주의 수업 과정이 진행된다. 6주 동안 열심히 한 사람은 2,500자를 다 그렸다고 하는데 나는 계속된 방향 수정 때문에 완성하지 못 했다. 완성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2018년2월: 조합형기초반수업끝

부담 없이 배우기에 적절한 수업

이 수업은 활자의 심미적인 완성도 중심이 아니라 프로세스를 경험해보고 배우는 과정이다. 마지막 소감으로 선생님께 획 하나하나를 그리는데 판단이 너무 어려웠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우리가 활자를 기획할 때부터 방향을 정해놓은 게 아니라서 그런 부분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셨다. 그런 것까지 고민하기에 시간이 부족하고 굉장한 스트레스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디에 내놓을 만한 결과물을 만드는 것은 힘들지만 입문 과정으로서 굉장히 도움이 되는 수업이었다. 부담 없이 배우기에 적절했다. 이후에도 개인적으로 계속 작업했다. 그 사이 방향도 많이 변경됐다.

넘과 덤, 럼의 ‘ㅓ’의 길이가 다르기 때문에 각각 다르게 엘리먼트를 설정했다.

꽉 찬 네모꼴이고 벌 수를 늘려 조합 규칙을 완성형에 가깝게 변경했다. ‘고’의 ‘ㅗ’와 ‘도’의 ‘ㅗ’는 첫 닿자의 모양에 맞춰야 안정감이 생기고. ‘거’의 ‘ㅓ’도 ‘너’의 ‘ㅓ’와 같게 그리면서 균형을 잡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ㅓ’를 그렸다.

조합형 글꼴은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완성형의 각 글자를 모두 그리는 이유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자소의 형태와 균형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조합형은 자소를 블록 쌓기처럼 조립하다 보니 모든 상황에서 균형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벌 수를 늘려 복합하게 만들면 작업 속도가 느려진다. 조합형의 장점인 경제성이 사라진다. 기초과정이지만 직접 만들다 보니 한글 디자인의 고됨을 조금이나마 체험하게 됐다. 그리고 활자 디자이너들의 노력과 노고에 존경심이 생겼다. 그리고 바로 완성형에 도전하기로 했다.

*용어설명: ‘고딕명조 잘못된 표현으로 최근에는 ‘민부리’, ‘부리라고 부른다. 문체부에서는돋움바탕 권장하기도 했다여기에서 쉬운 설명을 위해 ‘고딕’ ‘명조’ 사용하면서도, ‘고딕’을 ‘민부리’, ‘명조체 ‘해서체’계열로 지칭했다.

2018 5. 완성형 활자디자인 1 – 기획 수업 시작

조합형 기초반 수업이 끝나고 몇 달이 지나서야 완성형 활자 디자인 수업이 시작됐다. 회의실 구조의 강의실에서 처음 대면한 수강생들과 어색하게 기다리는데, 190이 넘는 큰 키에 잿빛의 긴 머리 스타일을 하신 분이 들어오셨다. 활자 관련 인터뷰에서 자주 뵀던 분이었다.

활자 디자이너 이용제, 계원예술대학교 교수님으로 바람체, 꽃길체 등의 활자를 디자인하셨다. 이 중에서 2005년에 발표된 ‘꽃길체’는 개인적으로 너무나 충격이었다. 본문용 서체는 ‘고딕’과 ‘명조’라고 불리는 서체들이 전부였던 시절, 너무나도 새로운 인상의 활자였기 때문이다. 본문용은 명조(바탕체)를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고, 그 외에 무언가 존재할 수 있을 거라 생각조차 못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수업의 기대감이 더 컸다.

쓰임 찾기

역사적 맥락, 사회적 맥락 등이 제작 배경이 될 수 있다는 얘기와 함께 구체적으로 활자가 쓰일 매체나 어떻게 사용될지를 구상하는 것이 첫 과제였다. 조합형 수업을 마치고 쉬는 기간 동안 제목용 서체를 만들며 연습을 해온 터라 이 수업에서도 굵은 제목용 활자를 만들려고 생각 중이었다. 그러나 본문용에 강점이 있는 선생님을 두고 제목용을 진행하는 것은 손해인 것 같았다. 또 본문용은 난도가 더 높아서 독학으로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기에 이 수업을 기회로 도전하기로 했다. 이왕이면 내가 몸담은 모바일 서비스를 위한 본문용 활자를 말이다.

모바일용 본문 활자를 선택하게 된 건 영어권 서비스에서는 본문에 세리프체를 사용하는 경우를 쉽게 발견할 수 있지만, 국내 서비스 중에선 거의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러 가지 기술적, 환경적, 조형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안타까운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예전에는 화면에서 부리 계열 서체의 가독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민부리가 당연했지만, 요즘 모바일 디스플레이는 300ppi를 넘은 지 이미 오래됐고 최근 디스플레이는 450ppi까지 나온다. 그래서 모바일용으로 제한하려고 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화면용 글꼴의 제약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패드의 경우는 260ppi에 그치지만 휴대폰보다 멀리서 보는 환경 때문에 큰 차이가 없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이렇게 민부리를 벗어난다는 기본적인 방향을 잡았다.

인상을 설명할 형용사 찾기

선생님은 활자의 인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객관적인 단어 사용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셨다. 대부분이 활자의 인상을 명확히 설명하고 있기보다 막연히 좋은 말만 가져다 붙이기 급급한 상황이다. 예를 들어 폰트를 설명할 때 흔히 사용되는 ‘현대적’이라는 표현이 있다.

50년 전에 누군가 서체를 만들 때도 현대적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지금 시대의 우리는 그 서체를 현대적이라고 느끼지 못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의도를 설명한 단어가 그 활자를 제대로 설명하고 있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는 ‘내가 다시 그렸다’ 이상의 의미가 있기 어렵다고 하셨다.

어떤 서체의 경우는 50년이 지났어도 요즘 시대에 만든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최근 몇 년사이 발표된 서체 홍보자료를 보면 ‘모던한’, ‘현대적인’ 등이 많이 나오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그 모든 서체가 같은 인상과 특징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고전적인 느낌을 표현했다’는 구체적으로 어느 시대인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1700년대와 1900년대는 엄연히 다른 시대 양식이 있는데도 우리는 흔히 ‘전통적인’, ‘고전적인’, ‘예스러운’ 등의 단어로 대신해서 말하고 있다. 신라 시대와 조선 시대가 같을 수는 없는 일이다.

‘둥글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이다. ‘차갑다’, ‘딱딱하다’, ‘온화하다’ 같은 표현들도 비교적 인상을 여러 해석의 여지 없이 표현할 수 있는 형용사다. 내가 말한 ‘건조함’과 듣는 사람의 ‘건조함’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어도, 건조한 느낌은 서로 알 수 있기 때문에 명확하고 소통 가능한 형용사가 중요하다. 자기가 만든 활자의 인상을 설명하지 못하는 건 조금 부끄러운 일일 수 있다고 하셨다.

지금 고백하지만 이게 가장 힘들었던 과정이었다. 막상 단어를 찾으면서 객관적인지 아닌지를 생각하다 보니 그 기준을 잡기 어려웠고 판단이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일단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기로 했다. 민부리에 치우쳐있는 환경에서 모바일 디스플레이가 표현력이 좋다면 왜 해서체 계열의 서체는 쓰이지 않고 있을까?

이론적으로는 명확히 정의 내릴 지식이 부족했기에 주관적인 관점으로 접근했다. ‘이질감’이었다. 모바일 기기나 UI 컴포넌트의 기계적인 인상이 붓글씨 기반 서체의 유기적인 인상과 충돌하기 때문에 이질감이 생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자책(기기와 앱)의 경우는 해서체를 사용하는 것이 더 좋다고 느꼈다. 화면에 노출되는 컴포넌트들이 적어서 충돌이 거의 없으면서도 전자책이라는 특징이 책을 연상시켜 이질감을 덜 느끼는 것 같다.

아이콘이나 UI 컴포넌트들과의 조화도 중요하다. 획만으로 판단하자면 ‘고딕’이 모바일에 잘 어울리는 인상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해서체의 구조를 기반으로 진행하기로 했기 때문에 이건 참고에 그쳤다. 현재 민부리를 답습하는 형태로는 또 하나의 ‘고딕’을 만들어낼 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해도 나중에 바뀔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도 이런 기획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이유는 나중에 한창 그리기 시작할 때 그때그때 기분에 의해 바뀔 수도 있고, 그렇게 많이 바꾸다 보면 지치거나 방향을 잃고 방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000 자쯤 그려놨는 데 기획의 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뒤집을 수는 없지 않은가. 변화는 주더라도 기획의 틀을 너무 멀리 벗어나지 않게 하는 방향 잡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느 정도 진행하니 너무 중요한 일이었다.  조합형 수업의 결과물만 생각해 봐도 획 대비 큰 활자를 그리다가 갑자기 굵은 민부리로 방향을 뒤집으며 방황했다.

활자의 인상을 담아낼 형용사 정하기 완료

우여곡절 끝에 인상을 담아낼 형용사를 정했다. 단어를 보고 별다를 거 없는데 이걸 이렇게 오래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본문용 활자라 특색 있는 단어가 포함되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글을 읽는 데 방해 되는 인상이 들어가면 안 되기 때문이다.

밑그림

단어 선정과 병행으로 밑그림을 진행했다. 처음엔 획의 모양을 정하기 위해 한 단어를 그렸지만 곧바로 문장을 그리게 됐다. 선생님의 제안으로 ‘sm신신명조’의 골격을 바탕으로 스케치를 시작했다. 현재 나와있는 가로쓰기용 본문 활자 중에서는 가장 안정감이 있고, 최정호 디자이너의 손길이 잘 담겨있어서다. 그나마 나는 빼대로 삼을 활자가 있어서 바로 시작할 수 있었는데, 기존에 없던 글꼴을 그리는 분들은 골격부터 획의 굵기까지 미리 시험해봐야 해서 더 오래 걸리기도 했다.

신신명조의 골격을 그대로 가져온 밑그림인데 엉망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장식처럼 보이는 부리들이 공간 및 균형을 잡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아무 조정 없이 다 삭제해버렸기 때문이다.

1차 밑그림의 문제였던 서체 간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획의 기울기를 줄이고 밖 공간을 줄여서 더 꽉 차게 보이도록 그렸다. 그러나 이 상태로는 신신명조와 차별점이 부족하다. 내가 원하는 방향도 아니었다.

폰트랩으로 옮기면서 부리를 다시 삭제했다. 아무래도 모바일에 어울리는 인상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이렇게 30자 정도를 그렸다.

여기까지가 대략적인 활자디자인 1: 기획 수업과정이다. 스케치도 중요한 부분이지만 방향을 정하는 기획이 더 비중 있는 수업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실제 이 수업은 이탈률이 50% 정도 되는 힘든 수업이다. 그런데 이 과정을 넘기면 보람을 얻는 일이 가득할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수업 2는 본격적으로 글자를 채우고 다듬는 과정인데, 그 몰입감이 주는 쾌감에 빠져들 것이다.

Author
임용태

임용태

데일리호텔 프로덕트 디자이너. 쿠팡 UX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정성적•정량적 관점의 업무 방식을 배웠습니다. 다른 회사에 다니면서 업무방식에 대해 관심이 생겼고 뇌과학과 인지심리학을 통해 디자인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imyongta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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