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X & Design

디자이너의 말 그릇

디자이너만큼 말을 잘해야 하는 직업이 또 있을까? 내 하루를 돌이켜보면, 생각보다 디자인에 할애하는 시간이 적다. 디자인 작업 외에는 모두 다른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 시간들이다.

더 자세히 살펴볼까? 개발자에게 디자인 의도를 설명한다. 회의 중 나와 반대되는 의견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한다. 팀원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대표에게 결과를 보고 한다. 회사 동료와 커피를 마시며 일상적 대화를 나눈다. 정보 전달을 위해 직접 누군가를 찾거나 메신저를 사용한다. 호흡이 긴 말은 메일로 대체한다. 당사자가 없을 때는 책상 위 쪽지를 남겨둔다. 이처럼 디자이너의 일상은 다양한 커뮤니케이션의 연속이다.

좋은 하루를 보내기 위해서 디자이너의 말 그릇은 어떤 재료로 채워져야 할까? 좋은 디자이너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완성도 높은 디자인만으로 부족할지 모른다. 디자이너는 시간을 들여 디자인하는 것에 익숙하다. 밤새 디자인 라이브러리를 찾고, 1픽셀에 집중한다. 최신 디자인 트렌드에 주목한다.

물론 이런 과정은 중요하다. 하지만 상황에 맞게 언어를 정제하고, 타인의 공감을 이끄는 것에는 유독 인색한 편이다. 내 경우 커리어의 위기가 디자인보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먼저 왔다. 위기 중심에는 항상 말이 있었다. 앞으로 언급할 9가지 말하기 방식은 지옥 같은 순간에 나를 지켜 준 갑옷 같은 것이다. 디자인은 자신 있지만 이야기의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자신이 없는 디자이너라면 알아두면 좋은 사실들이다.

▲디자이너는 복잡한 커뮤니케이션 환경에 노출된다

지옥에 이르는 길은 부사로 포장돼 있다

‘지옥에 이르는 길은 부사로 포장돼 있다(The road to hell is paved with adverbs)’ 공포 소설의 대가 스티브 킹이 작가 지망생을 위해 쓴 말이다. 글쓰기에서 부사는 군더더기의 역할일 뿐이니, 모조리 걷어내라는 것이다. 이는 말하기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상 속에서 ‘너무’라는 단어는 습관처럼 사용되는 부사 중 하나다. ‘이 음식 너무 맛있다’, ‘이 음악 너무 좋다’, ‘색이 너무 예뻐요’ 등등. 사실 ‘너무’에는 ‘지나치다’는 부정적 어감이 포함돼 있다. 이 경우 문법적으로는 ‘정말’을 사용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부사를 빼도 의미 전달에는 문제가 없다.

디자이너의 말 그릇을 위해 첫 번째 할 일은 ‘너무’, ‘매우’, ‘우아한’, ‘사랑스러운’과 같은 형용사와 부사를 일상에서 빼보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주어와 서술어 간격이 더 붙게 되고 말에 강한 힘이 실린다. 아래 그림의 ‘매우’와 ‘강렬한’은 삭제됐다. ‘좋은’과 ‘붉은색’에 이미 부사의 의미가 포함됐기 때문이다.

▲ 불필요한 부사와 형용사를 삭제한다

침묵이라는 언어

하라 켄야는 <<디자인의 디자인>>에서 공백이 텅 빔이 아닌 ‘가능성’이라고 말했다. 시각물의 공백은 말하기의 침묵에 해당한다. 대화 전 침묵은 생각을 잘 전달하기 위한 시간이고, 대화 후 침묵은 앞에 있는 사람을 배려한 시간이다. 전문가들은 말하기 전후에 2초 정도 할애하라고 한다. 끊기지 않는 말하기가 좋은 화법이라는 생각은 오해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애리조나 주 총기난사 사건 희생자 추모식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가 크리스티나가 꿈꾸던 것과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어린이들이 바라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오바마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 침묵이 흘렀다. 10초 뒤 그는 오른편 사람들을 보았다. 20초 뒤 길게 숨을 내쉬었다. 총 51초의 힘겨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다시 연설을 이어갔다. 각 언론은 오바마 최고의 연설이라 찬사를 보냈다. 긴 침묵 속에는 언어로 닿을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침묵은 말하기의 상대적 개념이 아닌 말하기의 한 형태다.

설득을 위한 듣기

커뮤니케이션 학자들은 설득할 때 말하기보다 듣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설득을 위한 이상적 비율은 3:7이라고 한다. 3은 말하기다. 말의 양과 설득력이 비례하지 않는 셈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존재한다.

첫째, 말하는 비중을 줄이면 생각할 시간이 많아진다. 이는 말실수 감소로 연결된다. 주위에 말솜씨는 뛰어나지만 실수가 많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대부분 굿 리스너(Good Listener)가 아닌 경우가 많다. 둘째, 많은 말의 비율로 화자가 대화를 지배한다는 마음을 주는 것이다. 잘 듣는 사람 앞의 화자는 ‘저 사람은 내 말을 경청하는구나’하는 마음이 들 것이다. 이는 들어주는 이에 대한 호감도 상승으로 연결된다. 일로 만난 사이라면 듣기 비율을 높여 유대감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 설득이 한결 쉬워진다. 만약 주위에 사람이 없다면 대화를 폭식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평소 대화를 상기하고 듣기와 말하기 비율을 주기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

▲ 설득을 위한 최고의 무기는 듣기다

적, 성, 화의 유혹

우리는 적, 성, 화라는 접미사를 좋아한다. 발전적, 유연화, 현실화, 적합성 등이 해당된다. 이를 자주 사용하면 언어에서 권위가 느껴져 대화가 경직되기 쉽다. 이는 좋지 못한 커뮤니케이션으로 연결된다.

생각해 보면 디자인과 관련된 많은 언어가 접미사로 이뤄진 것을 알 수 있다. 가독성, 심미성, 연결성, 개념적, 차별화. 부끄럽지만 내가 하루 동안 내뱉은 말들이다. 같은 직종 간 대화라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문제는 디자인에 이해가 적은 사람과 대화할 때 발생한다. 불필요한 접미사를 남발한다면 상대가 대화에서 배려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생긴다. 적, 성, 화에는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는 어감이 숨어있으니 빈도를 줄이는 연습이 필요하다.

▲ 현실화, 발전적에서 접미어를 삭제했다

엘리베이터 피치

엘리베이터 피치(Elevator Pitch)라는 말이 있다. 이는 실리콘 밸리 대표들이 투자자와 엘리베이터를 타는 도중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30초~1분 이내의 대화를 의미한다.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은 사람이 누군가의 말을 들을 때 15초 정도만 집중한다고 한다. 그 시간 동안 상대 이목을 끌지 못하면 설득이 힘들어진다. 처음 제시된 정보가 나중에 제시된 정보보다 기억에 더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초두 효과(Primacy Effect)’라고 말한다. 사람은 듣기에 관해서만큼은 지독한 구두쇠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15초 안에 상대를 주목하게끔 하기 위해서는 결론부터 말하는 편이 낫다. 이를 ‘전결형 화법’이라고 한다. 아래 그림을 보면 두 가지 예시는 동일한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목적(매출)과 과정(리디자인)이 다르게 배치돼 있다. 언어에서 초두 효과는 목적을 먼저 내비칠 때 발생한다. 타인의 욕망을 미리 파악해 둔다면 도움이 된다. 체면이 중요한 클라이언트의 우주적 말에 속지 말자. 대부분의 목적은 매출인 경우가 많다.

초두 효과를 꼭 언어에 한정 지을 필요는 없다. 나는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할 때 말보다 한 장의 강렬한 이미지를 선호한다. 그 후 말을 이어갈 때 주목도가 높아지는 경험을 자주 했기 때문이다.

▲ 목적이 먼저 나오는 전결형 화법

오컴의 면도날(Occam’s Razor)

데이터를 다루는 디자이너의 경우 불필요한 가정은 독이 된다. 심각한 경우 팀에서 신뢰를 잃기도 한다. 이 경우 오컴의 면도날이 도움을 준다. ‘단순성의 원칙’이라고도 하는 이 개념은 논리적으로 가장 단순한 것이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아래 그림을 보자. 콘서트 도중 한 관객이 울음을 터뜨렸다. 노래는 발라드였고 가수는 그날따라 목 컨디션이 좋았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정보는 제한적이다. 내 생각에 노래 가사가 가족을 떠올릴만한 것이었다 해도, 정보가 적을 경우 확실한 쪽으로 판단하는 편이 낫다. 아폴로 11호 달 착륙에 관한 예시도 마찬가지다. 조작이나 외계인은 해석의 여지가 넓다. 이럴 때 오컴의 면도날을 이용해 판단 오류의 가능성을 잘라내야 한다.

▲ 정보가 제한적일 경우 불필요한 가정을 최대한 줄인다

욕망에 솔직하기

우리는 보통 반대 의견을 내는 데 소극적 경향이 있다. 상대 마음이 상할 수 있다는 마음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 의견은 상대방을 무시하는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애매한 태도가 업무 시 더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타인은 대체로 내 의도 파악에 능숙하지 못하다. 내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보여도 관심은 딴 데 가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의도가 불명확한 말하기는 상대를 더 미궁 속에 빠트린다. 핵심을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대화 도중 내가 얻고 싶은 것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욕망에 충실한 것은 생각보다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감정 쿠션

논리는 뛰어나지만 타인의 자존감을 자주 떨어뜨리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과는 오래 대화하고 싶지 않다. 배려 없이 전달된 정보는 마음속 스팸함에 도착할 것이다.

회사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하루 이틀 보고 말 관계가 아니다. 이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 무작정 논리만 펼쳐서는 곤란하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감정 쿠션’이 있다. 곧바로 차가운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감을 일으킬 수 있는 자원을 먼저 활용하는 것이다. 이때 상대에 관해 미리 알고 있는 정보가 있다면 효과적이다.

상돈 님 어제 결혼기념일 잘 보내셨나요?
보라 님 식단을 키토식으로 바꾼 지 꽤 되셨는데 효과가 어때요?
희영 님 스키장은 재미있으셨어요?

만약 정보가 제한적이라면 오늘 입은 옷에 대한 칭찬도 좋다. 그마저도 없다면 날씨 이야기라도 하자. 감정 쿠션이 담기면 정보에 논리만으로 닿을 수 없는 신뢰도가 담긴다. 그런 정보는 스팸함으로 가지 않는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 감정에도 쿠션이 필요하다

나 전달(i-message) 화법

회사에서 누군가 내게 실수를 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 쉽다. ‘김대리, 왜 일을 그렇게 엉망으로 처리했어!’, ‘자네가 보낸 메일 때문에 클라이언트가 화났잖아. 어떡할 거야?’ 애써 쌓아 온 유대감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다. 이를 ‘너 전달 화법(You-message)’이라고 한다.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은 누가 내게 실수를 저질렀을 때 말하는 순서를 다음과 같이 배치하라고 조언한다.

1) 상대 잘못 말하기
2) 나에게 끼친 영향 말하기
3) 내 기분 말하기

이를 ‘나 전달 화법(i-message)’이라고 한다. 이 화법의 장점은 상대 잘못을 지적하는 동시에 존중도 내비치는 효과가 있다. 우아하게 화내는 셈이다. 회사에서 직급이 올라갈수록 더 중요해지는 화법이라고 할 수 있다.

▲ 나 전달 화법의 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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